[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왕청문 사건의 진실

김주원∙ 탈북자 xallsl@rfa.org
2023.11.15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왕청문 사건의 진실 사진은 김일성이 46세이던 1958년 보천보혁명전적지를 둘러보는 모습이다. 보천보전적지는 일제시기이던 1937년 6월 4일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김일성이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로 잠입해 일제와 전투를 벌인 장소라고 북한은 선전하고 있다.
/연합

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도서이며 북한주민들을 세뇌하기 위한 자서전입니다. 오늘은 세기와 더불어 1 3 9 '왕청문의 교훈'에 실린 내용의 허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일성은 '왕청문의 교훈' 서두에서 “1929년 가을에 국민부는 흥경현(興京縣) 왕청문에서 동만청총과 남만청총을 통합하기 위한 대회를 소집하였다며 이를 남만청총대회라고 하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왕청문 사건 1929 10 16일 독립군 내 우익세력인 국민부가, 남만청총대회에 참가하러 간 20대 청년들인 최봉(崔峰), 이태희(李泰熙), 지운산(地雲山), 이광선(李光先), 한의철(韓義哲), 이몽렬(李夢烈) 6명을 엠엘파와 결탁했다며 살해한 사건입니다.

 

북한에서 이 사건을 주제로 만든 소설이, 작가 천세봉이 쓴 '은하수'입니다.

 

이 사건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남만청총대회는 조선독립을 위해 싸운다고 나선, 공산주의 사상에 빠진 좌익청년들과 민족주의 성향의 반공청년들이 반일의 기치아래 연합하며 동만과 남만 일대 청년들이 하나로 규합하기 위해 소집된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대회를 소집한 국민부 독립군들이 여기서 좌익청년들을 학살한 사건이죠.

 

당시 사건에 대해 길림총영사가 일본외무대신에게 1930 1 14일에 올린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수습대회 결의록 보고서와 1929 12 20일에 열린 최봉(崔鳳) 6명의 추도회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이 사건에 대해 구체적인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남만참변(南滿慘變)이라고도 불리는 왕청문 사건(旺淸門 事件) 당시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이었던 좌파성향의 이종락은 1929 11 2일에 열린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수습대회, 일명 남만청총대회에서 중앙간부로 선출되었습니다.

 

1929 11 18일에 발표된 남만청총대회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안에는 당시 행방불명 중이던 중앙집행위원 김성파를 해임하고 최창걸을 그리고 상무집행위원으로 고이허, 차광수, 계영춘, 박성일, 김수산, 김근혁, 김혁이 선출됐다고 기록됐습니다. 최창걸, 차광수, 김혁 등은 김성주 보다 7~9년 연상의 선배였으며 상급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20대 청년들인 이들이 보기에는 10대의 어린 김성주는 별 볼일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이들이 자신에게 충직했던 인물로 조작해 놓았습니다. “거짓말도 백 번하면 진실이 된다는 속담이 있듯이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연설문이라고 모아놓은 노작들을 어린 소학교 시절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부단히 반복, 교육하여 세뇌시켰던 것입니다.

 

종합해보면 김일성, 당시 김성주는 1929 5월 독립군의 국민부 산하 정규군으로 창군된 조선혁명군, 즉 공산주의 청년들이 보는 견지에서는 반동단체라고 할 수 있는 국민부 산하 청년조직에서 말단 부하로 활동하였던 것입니다.

 

김일성 즉 당시 김성주는 왕청문 사건 당시 자신의 상관이었던 이종락과 함께 국민부 편에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고록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오히려 국민부를 비판하고 있으니 그것도 참 아이러니 한 점입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과 대립하던 국민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지만 청년공산주의자로 자신을 둔갑하였던 김일성은 이러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1930 3 14일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은 산하의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 남만농민동맹(南滿農民同盟), 남만여자교육회(南滿女子敎育會) 3개 단체를 통합하여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을 조직하였는데 그때 김성주는 한갓 무송과 안도지방을 담당할 지부동맹조직위원(支部同盟組織委員)으로 선출되는데 그쳤습니다. 그러나 현재 북한에선 이때 상황은 숨기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1929년 가을부터 1930 5월까지 길림에서 감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 1930 3 14일에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 무송안도지부동맹조직위원으로 선출되었다는 것은 회고록 내용이 거짓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상관이었던 이종락을 무조건 따랐던 김일성, 당시 이름 김성주는 1930 8 19일 이종락을 따라 국민부를 탈퇴하고, 국민부에 대항하는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하게 됩니다. 당시 독립군 부사령이었던 양세봉은 독립군 부대 내 젊은 대원들이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들면서 부대를 탈출하여 길림지역의 농민들로 조직된 적위군에 가담하고 있어 골치를 앓고 있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남만청총대회에 대한 김일성의 회고록 내용을 영화로 각색한 혁명영화 '조선의 별'의 한 장면이 기억날 것입니다. 양세봉 부사령이 김성주를 보면서 화를 내는 대사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네가 이렇게 분별없이 공산주의를 지향하고 젊은이들을 추동하고 다니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길이다라며 큰 소리로 화를 내던 양세봉의 대사가 귓가에 쟁쟁합니다.

 

남만청총에 대한 내용은 재미교포 유순호 작가가 당시 이 사건을 목격한 조선족 증언자들을 취재해 집필한 도서 「김일성평전」에도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1929년 가을 남만청총과 동만청총이 통합하기 위한 대회가 왕청문에서 소집되었고 당시 동만청총은 제1차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화요파가 거의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되면서 만주 공산주의 청년들인 엠엘파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청년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 성향의 반공산주의 청년들 사이의 살벌한 대치가 벌어진 현장에는 청취자 여러분들에게도 익숙한 차광수와 최창걸이 있었습니다. 당시 차광수는 총까지 가지고 있었으며 최창걸은 독립군 제6중대장이었습니다. 결국 이종락의 9중대뿐 아니라 6중대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손길을 뻗고 있다는 사실에 양세봉과 현익철은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왕청문 사건은 어느 하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독립운동을 한다면서도 여러 계파로 나뉘어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정의부와 참의부, 신민부를 결속하여 3부를 통합하려 했다는 사실은 김일성의 회고록에도 나와 있습니다.

 

독립군 내 공산주의 사상조류에 빠져있던 차광수를 비롯한 청년공산주의 자들을 남만청총대회를 통해 기를 눌러놓으려고 했던 조선혁명군 현익철과 부사령 양세봉은 대원들을 왕청문에 파견하였고 이를 눈치챈 최봉 등은반동분자들과 싸우자며 독립군들의 총까지 빼앗으려고 했던 것이 더 일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위험을 느낀 최창걸이 김성주의 손을 잡고 왕청문에서 줄행랑을 놓아 피신했고 김성주는 이종락에게 독립군들이 청총 대표들을 마구 쏘아 죽인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합니다. 김성주는 이종락에게청총의 대표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공산주의를 지향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독립군의 총에 맞아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라며 울분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1920년대 후반기 중국 동만에 조직되었던 조선인 청년단체동만청총의 간부였고, 김일성 회고록에도 나오는 왕청문 사건에서 살아남았던 김금열이란 사람이 1987년까지 중국 용정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생전에차광수와 이종락은 당시만 해도 유명했지만 김성주란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다아마 김성주는 차광수나 이종락의 심부름이나 따라다녔을지 모르겠다고 증언했습니다.

 

북한에서 선전하는 남만청총과 왕청문 사건이 회고록에서는 김일성도 주요 직책에서 한몫을 한 것처럼 오도되고 있지만, 이렇듯 진실은 겁에 질린 김성주가 최창걸의 손에 이끌려 도망친 10대 소년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이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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