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길림 감옥 투옥에 대한 날조된 기록
2023.11.29
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도서이며 북한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오늘은 세기와 더불어 1권 3장 10절 ‘철창속에서’에 기록된, 김일성이 길림 감옥에 투옥되었다는 날조에 대해 진실을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해방 전 1940년대 일본군의 대토벌에 질겁하여 소련으로 도망친 김일성, 그가 5년 동안 소련 군인으로 복무한 사실에 대해선 고백하지 않은 것처럼, 길림 감옥에 대한 회고 내용도 1%의 진실에 99%의 거짓으로 꾸민 역사왜곡이 틀림 없습니다.
김일성은 세기와 더불어에서 1929년 가을에, 길림 감옥에 체포되었다가 다음해인 1930년 5월 초에 출소했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1946년 한설야가 쓴 김일성 전기물 ‘만경대’에는 길림 감옥엔 1929년에 두 달 투옥되었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1900년 8월 3일 함경남도 함주군 주서리(당시 함흥군 하구리)에서 지방관료 한직연의 차남으로 태어난 한설야는 서울에 있던 경성제일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중국 베이징에 있던 익지영어학교(益智英語學校)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일본 니혼대학에서 유학을 했던 작가입니다.
한설야는 해방 후 북한에서 소설 ‘땅’을 써서 유명해졌던 소설가 이기영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연맹을 창립하고 1946년 김일성을 접견하면서 김일성이 구술한 것을 받아 김일성 전기 ‘만경대’를 썼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의 구술을 받아썼다고 해도 길림 감옥 2달 투옥설은 점차 세월이 지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1949년 출판된 김일성의 ‘해방투쟁사’에는 1927년에 8달 투옥됐다고 서술되었고 1952년 출간된 김일성 약전에는 1927년에 투옥, 1928년에 출옥이라고 하였으며 1958년 출간된 ‘해방투쟁사’에는 1929년 투옥, 1930년 출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973년에 노동당출판사가 출간한 ‘정치사전’에는 1929년 10월 투옥, 1930년 5월 초 출옥으로 서술되었다가 1990년대 출판된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1929년 가을부터 1930년 5월 초까지 7개월로 서술된 것입니다.
이렇게 날짜들도 들쑥날쑥한 걸 볼 때 김일성의 길림 감옥 투옥도 가짜라는 사실이 불 보듯 뻔 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생일대 단 한번의 감옥생활도 정확한 날짜를 모른다는 것은 조작한 역사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은 ‘세기와 더불어’에서 길림 감옥에 투옥된 이유가 독서회 활동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회고록엔 “중국반동군벌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닥치는대로 검거, 투옥하던 당시에 길림제5중학교 학생들이 독서회에 대해 쓸데없이 떠들어댄 것이 실마리가 되어 길림육문중학교 학생들까지 체포되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당시 중동철도사건으로 8천여 명의 중국동북군이 소련의 포로가 된 일로 중국경찰들과 중국 국민당 군인들은 오히려 공산당이라면 치를 떨고 있던 상황이었고, 조선독립군 내에 공산주의 사상을 유포하고 있던 차광수와 이종락의 심부름을 하던 17살의 김성주, 바로 김일성도 중국 경찰에 체포되게 됩니다.
수백 명의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중국조선족 출신 재미교포 유순호 작가는 도서 ‘김일성 평전’을 집필했고 여기엔 당시 중국경찰이었던 축옥성의 증언도 적혀있습니다. 축옥성은 “당시 김성주라는 이름은 알려지지도 않았고 공산당의 선전에 속아 넘어간 중학생들이 소련을 지지하는 삐라를 뿌리다가 중국 경찰에 걸려들어 감옥살이를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손정도 목사가 이때 자신의 출옥을 위해 동북변방군 부총사령관 겸 길림성 주석이었던 장작상과도 직접 교섭하였던 것으로 설명했지만 축옥성의 증언은 달랐습니다.
소련공산당을 지지하는 삐라를 뿌리다가 잡힌 학생 중엔 정씨 성을 가진 중국인이 있었는데 그의 부친이 장개석과도 친하게 지내던 사이여서, 그 학생이 풀려나면서 다른 애들도 감형이 되어 출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역사학자들 역시 김일성이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정도 목사가 장작상에게 뇌물을 먹이면서 김일성의 석방운동을 했다는 내용은 황당한 거짓이며, “당시 중국 군벌의 큰 인물인 장작상이 가난한 조선인 목사로부터 뇌물을 받아먹었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하물며 손정도에게 들고 갈 뇌물이라고 할만한 재산이 어디 있었겠는가”라고 부인했습니다.
또한 김일성은 출옥과정에서 자신을 위해 개입된 인물들로 장작상과 손정도 등 중국인이나 조선인 중 당시 유명인사들을 들어, 자신이 마치 큰 인물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으나 당시 17살의 김일성, 실제 이름 김성주는 별 볼 것도 없는 중학생에 불과했습니다.
김성주와 다른 학생들의 출옥은 중국 국민당 육군소장이었던 장학량이 길림성장 장작상에게 학생들 모두를 놓아주라는 전보를 보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김성주의 길림 감옥 투옥도 거짓투성이 입니다. 중국 동북육군 제682연대에서 소대장을 하다가 임무 중 부상을 당하여 제대된 후 길림시에서 경찰로 근무했던 축옥성은 “동북군 8천 명이 소련의 포로가 되고 여기에 학생들마저 소련공산당을 지지하는 삐라를 뿌리자 중학생이건 소학생이던 모조리 잡아들였다. 나중엔 구치소가 넘쳐 터질 지경이 되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김성주도 이렇게 잡힌 학생 중 한 명에 불과했고 심문과정에서 불손한 태도로 쉽게 풀려나진 못했습니다. 축옥성은 심문조사 내용도 공개했습니다.
중국 경찰이 “길림5중학교 마르크스 독서회에 너도 참가했지? 그럼 독서회에서 네가 맡았던 직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김일성은 “아무 직책도 없습니다. 그냥 돌아가면서 좋은 책들을 나눠 읽곤 했습니다”라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경찰들이 너를 그곳으로 인도한 사람을 대라고 말하자 스스로 했다면서 자신이 책임을 떠 안았고, 성이 독같이 난 경찰들이 김일성을 마구 때려 그의 얼굴이 팅팅 부어올라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경찰이 “너의 어머니는 월사금이 비싼 육문중학교에 너를 보내놓고 학비 마련으로 고생을 하는데 왜 제대로 살려 하지 않느냐”고 말하자 김일성은 눈물을 죽죽 흘렸다고 합니다.
경찰이 독서회 사건에 관여한 여러 명의 사진을 내놓고 확인하려고 했지만 김성주는 끝내 부인했고 이런 이유로 17살 나이에 '진짜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게 된 김성주는 길림육문중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깊이 공부하게 된 것이 15살 때인 길림육문중학교 시절이라면서 화성의숙 때 이미 아버지의 친구 김시우란 사람에게서 '공산당선언'을 얻어봤고 그것으로 화성의숙 친구들에게 계몽도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길림육문중학교에 입학하여서는 '공산당선언', '자본론', '국가와 혁명', '임금로동과 자본' 등을 비롯한 마르크스-레닌주의 고전들과 해설책들을 손에 잡히는대로 다 읽었다고 하였지만 이것 역시 황당한 거짓말입니다.
1926년 중국의 시골 화전에는 도서 ‘공산당선언’이 있을 리가 없었고 다른 책들도 1929년 이후에나 겨우 중국어 번역본이 나온데다 그것들이 길림으로 들어가려면 또 시간이 지나야 했기에, 당시 김일성의 국민학교 졸업정도 중국어 실력으로는 그 어려운 책들을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길림감옥의 투옥과 출옥과정을 온갖 허위로 꾸며놓고도 모자라 옥중에서도 독서를 계속 했다느니, '깡톨'이라는 별명의 조폭 잡범도 개조했다느니, 감옥에서의 단식투쟁과 철창 속에서 구상한 내용까지, 궤변을 늘여놓고 있지만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세기와 더불어는 세상에서 가장 저질적이고 거짓으로 왜곡된 도서라는 점을 청취자 여러분들은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거짓이 드러나고 진실이 밝혀지기는 것이 두려운 김씨왕조, 그것이 바로 북한이 인터넷을 폐쇄시킨 이유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