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 영화감독 납치사건

김주원· 탈북자
2019.12.25
shinsangok_abduction_kji_b 북한 영화수준을 높이는데 협력해달라고 요청한 김정일이 김상옥.최은희부부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최은희씨는 이때 핸드백에 감춰둔 녹음기로 김정일과의 대화를 녹음했다.
/연합뉴스

40대 이상 되는 분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던 영화촬영소입니다. 그러나 이 신필름영화촬영소 창립자인 신상옥과 그 부인 최은희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안다고 해도 그들이 ‘사람못살 남조선에서 탈출하여 공화국 품에 안긴 영화예술인 부부’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로 그들 부부는 홍콩에서 납치되어 북한에 끌려가 강제로 신필림영화를 찍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두 시간에 걸쳐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 대남연락소 공작원들이 1978년에 신상옥 부부를 납치한 사건동기와 그들이 북한을 탈출한 과정 등 이 사건전말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얘기한 것처럼 북한당국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많은 ‘혁명영화’들을 제작하였습니다. 김정일은 주민들에게 개봉된 혁명영화 관람을 통해 선전선동사업에서 김일성의 우상화와 혁명전통교양에 중심을 두도록 하면서도 자신은 외국영화는 물론 수백편이 넘는 남한영화들을 보았습니다. 김정일은 당시 한국에서 유명했던 신필름영화도 즐겨보았습니다. 김정일은 북한에 신필림 영화감독인 신상옥과 부인인 배우 최은희와 같은 영화감독과 배우가 없는 것을 아쉬워하였고 그들을 납치해서라도 인기영화를 제작하려고 하였습니다.

김정일이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를 처음으로 본 것은  1972년 남북한 당국이 7.4남북공동성명 채택을 위해 한국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평양을 방북하고 북한 부수상 박성철이 서울을 방문하면서 당시 선물로 받은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가져와 김정일에게 준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북한의 영화는 노동당의 선전선동을 위한 도구로 제작되기 때문에 연기가 부자연스럽고 내용이 딱딱하여 북한주민들에게도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이 당시 보았던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애틋하고 순결한 애정이 넘쳐나는 영화여서 김정일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역은 최은희였고 감독은 신상옥이었습니다. 김정일은 이 영화를 보고나서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를 데려오라고 대남연락부 임호군 부부장에게 지시했다고 합니다.

신상옥 감독은 1926년 10월 18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한의사인 아버지 신병용과 어머니 김봉선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부터 그림그리기에 흥미를 가졌던 그는 청진 경성고등보통학교 시절에 미술반 반장으로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미술화가의 꿈을 가졌습니다. 광복 1년 전인 1944년에 일본 도쿄미술대학교에 유학갔지만 그 다음해에 포기하고 서울에서 선전포스터를 그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미술에 취미가 있었던 그는 20살 나던 1946년에 서양미술화가로 활동하다가 2년 후인 1948년에 영화 ‘희망의 마을’ 미술감독으로 영화제작에 참가하였습니다. 그 후 영화 ‘여성일기’, ‘파시’, ‘악야’ 등에 미술감독으로 참여하면서 영화감독의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상옥 감독은 남한과 북한에서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일생동안 154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그 중에 자신이 직접 감독한 영화는 74편에 달합니다.

신상옥 감독은 1950년대와 60년대, 70년대에 수십편의 영화를 직접 작품도 창작했고 영화연출도 하면서 영화감독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당시 그가 제작한 영화들로는 ‘악야’, ‘어느 여대생의 고백’, ‘로맨스 빠빠’, ‘성춘향’, ‘장미와 들개’, ‘상록수’, ‘빨간 마후라’, ‘여자의 일생’, ‘전쟁과 인간’, ‘한강’, ‘속이별’, ‘아이 러브 마마’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영화 ‘상록수’를 관람하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눈물까지 흘렸다는 얘기 나올 정도로 그가 제작한 영화들은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신상옥 부부가 제작한 영화들은 1960년대 일본과 베니스영화제, 아카데미영화제들에도 출품되었고 한국에서 진행되는 많은 영화제들에서도 방영되어 대종상 감독상, 청룡영화상 특별상 등 많은 상을 수여받았습니다. 한국에서는 1960년대 한국영화역사를 신필름 신상옥 왕국의 전성기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홍콩을 비롯한 외국영화사와의 합작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영화제작사가 거대하게 팽창되면서 재정적인 위기에 몰렸습니다. 1953년에 결혼을 하였지만 둘 사이에는 자식이 생기지 않아 양자 신정균과 양녀 신명희를 입양하였고 1970년에 신상옥 감독은 영화 ‘어느 소녀의 고백’에 출연한 배우 오수미 사이에 두 아들인 신상균과 신승리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불화가 되어 1976년에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별거를 하게 되었고 1978년 1월 14일에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당국은 홍콩에 혼자 사업차로 나왔던 최은희를 납치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안양예술학교의 교장이었던 최은희는 배우양성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편으로는 영화제작에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화 '양귀비' 제작을 협의하려고 홍콩을 방문하여 지인들과 해변을 산책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남성들이 마취제를 사용해 납치하였고 그는 8일 만에 남포항으로 강제 입북되었습니다. 최은희를 납치할 데 대한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당국은 대남연락소와 일본 조총련을 동원하여 최은희에게 합작영화 작품제작에 대해 논의하고 싶다는 말로 유인하여 홍콩에서 납치한 것입니다. 홍콩 해변가에서 최은희 배우를 만난 그들은 토의를 위해 우선 마카오로 가서 논의하자며 배에 태웠고 다시 중국으로 가는 배에 옮겨타서는 “지금 장군님 품으로 가는 중입니다”라며 납치사실을 공공연하게 알려주었습니다.

배우 최은희가 울면서 항의하자 그들은 마취제로 의식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배 안의 침실에서 깨어나 보니 벽에는 커다란 김일성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이것을 보고는 또다시 기절하여 정신을 잃었습니다.

신상옥 감독은 홍콩에 간 최은희가 소식이 없자 수소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별거하는 사이었지만 지난 23년 동안 영화제작도 하며 함께 살았던 정은 마음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은희를 찾으러 홍콩에 갔던 그 역시 납북되었습니다. 당시 신필름 홍콩지사에 근무하던 교포 이영생은 북한에 매수된 북한공작원이었습니다. 그는 북한당국에 최은희만 납치하면 신상옥이 찾아올 것이며 그러면 둘 다 납치할 수 있다는 내용을 보고했던 것입니다.

최은희가 납치당한 후 신상옥 감독은 그를 찾아 홍콩과 프랑스, 일본 그리고 동남아 여러 나라들을 6개월 동안이나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신필름 홍콩지사장 김규화는 북한 스파인 이영생이 주는 달러에 넘어가 신상옥을 유도하여 납치를 도운 죄로 귀국하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년 복역했습니다. 홍콩 경찰은 신상옥 감독을 중국으로 끌고 간 정체불명의 일본인들을 추적하여 그들이 북한 공작원임을 밝혀냈지만 이미 도주한 상황이어서 체포할 수는 없었습니다.

북한에 납치된 이후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는 5년 동안 만날 수 없었습니다. 김정일은 이들을 이용해 영화를 만들려고 하였지만 국제사회에서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운동이 확산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이들이 납북되어 5년이 되던 1983년 여름에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당국은 북한영화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서약서를 받아내고 그들의 상봉도 이루어지도록 해주었고 영화제작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북한당국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언제 처형될지 모르는 그들은 항상 공포속에서 살았습니다. 1983년 10월 19일 저녁 6시부터 3시간 동안 중앙당 본부 청사 3층 김정일 집무실의 접견실에서 최은희를 만난 김정일이 신상옥 감독을 데려오려고 최은희를 먼저 데려왔다고 말해 이 납치사건의 주범이 김정일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음시간에는 신상옥 부부가 북한에서 생활하다가 탈출한 과정에 대해 얘기하도록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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