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북한유학생 망명자들

김주원∙ 탈북자
2016.12.27
nk_student_abroad_b 지난 1989년 12월 단국대 난파음악관에서 열린 "망명북한유학생초청 자유대토론회"에서 귀순한 북한 유학생 김운학,동영준씨가 2백여명의 ROTC학생들과 대화를 가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한동포 여러분!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그러하듯이 북한도 국가과학기술발전을 위한 인재육성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북한은 사회주의 공업화를 위해 김일성종합대학부터 신설하고 소련과 중국, 동유럽국가들, 지어 서방나라들에도 많은 유학생들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외부세계를 접한 유학생들은 폐쇄되고 낙후한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오직 한 사람, 수령만을 위하여 전체 인민이 노예처럼 살아야 하는 조국의 현실을 깨닫고는 정치적 망명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 이전까지 유학생들 속에서 망명자들이 크게 늘자 북한 당국은 그 이후부터 유학생 수를 현저히 줄였습니다.

북한유학생들의 망명역사에 대해 말하자면 1950년대 중엽 동유럽사회주의 국가들에 파견되었던 유학생들의 첫 망명사례부터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북한 유학생들 속에서 있었던 첫 망명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1953년 3월 5일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흐루시초프는 1956년 2월에 진행된 소련공산당 제20차대회에서 스탈린의 개인우상화 정책과 공산독재, 반대파에 대한 폭력숙청을 날카롭게 비판하였습니다.

그 영향은 북한에 곧바로 미쳤습니다. 1956년 8월 30일에 평양예술극장에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렸는데 당시 토론자로 나섰던 상업상이었던 윤공흠이 김일성의 독재정치와 개인숭배를 강력히 비난하였습니다. 그는 김일성이 당중앙위원회의 어떤 결정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민주당 당수였던 최용건을 조선노동당 부위원장으로 소환하였다고 비판했고 정준택과 정일룡 등 친일파들을 경제정책의 요직으로 등용한 데 대하여 하나하나 폭로했습니다. 그리고 “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집도 없이 토굴 속에서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데 당과 정부는 이런 처참한 현실을 무시하고 군수공업 중심의 중공업 정책을 우선적으로 펼치고 있다”고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가며 비판수위를 높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윤공흠과 그를 비호한 조선직업총동맹 위원장 서휘도 ‘반당종파분자’로 몰렸습니다. 이와 관련해 1956년 9월 3일에 당시 소련주재 북한 대사였던 리상조는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흐루시초프에게 몰래 밀서를 보냈습니다. 그는 밀서에서 김일성이 당 활동을 독단적으로 처리하고 있으며 개인숭배를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과 동지적인 비판을 고칠 대신에 폭력으로 간부들을 마구 철직시키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소련공산당의 강력한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밀서 내막이 드러나자 김일성은 리상조 대사를 수정주의자로 몰아 출당, 철직시켰는데 이것이 북한 역사에서 아직도 화제가 되고 있는 ‘8월 종파’ 사건입니다. 김일성은 리상조와 함께 해방 전 국내와 해외에서 독립활동을 해 온 혁명가들을 ‘종파’라는 딱지를 붙여 무더기로 체포하고 지방으로 추방했습니다.

‘8월 종파’ 사건으로 부모들과 지인들이 권력의 자리에서 제거되자 동유럽나라들에 파견됐던 유학생들이 크게 반발했습니다. ‘8월 종파’ 사건이 터지자 김일성의 개인숭배와 독단주의를 제일 강도 높게 비판한 유학생들로는 소련 전연맹국립영화예술대학 영화문학 창작과 연출과와 촬영과에서 공부를 하던 허웅배, 한대용, 정린구, 리경진, 김종훈, 리진황, 최국진, 양원식 8명이었습니다.

1957년 11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조선유학생대회가 열렸는데 유학생 허웅배가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였고 소련으로의 망명을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다른 유학생들도 1958년 1월 겨울방학을 맞으며 러시아인 친구의 집에 모여 ‘8월 종파’사건과 김일성의 개인숭배, 숙청에 대한 비판 등 논쟁을 치열하게 벌리던 끝에 집단적인 망명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개인숭배는 헌법과 당내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것이다. 진짜 김일성은 전설적인 독립활동가이며 1930년대 사망하였으나 해방 후 소련이 김성주를 가짜 김일성으로 만들었다. 북한의 삶은 노예의 삶이다. 지금 북한은 종파처형 바람이 불고 있고 먼저 망명한 허웅배를 동조한 우리도 북한에 돌아가면 처형이 불가피하다”는 내용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망명 입장을 밝혔습니다.

김일성은 정치적 망명을 선택한 유학생들 전원을 퇴학시키고 강제귀국 할 데 대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귀국하면 즉시에 처형될 수 있음을 간파하고 모스크바에서 백여리 떨어진 산속에 들어가 천막을 치고 생활했습니다. 먼저 망명한 허웅배가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서 쌀과 김치 등을 들고 찾아왔고 “참사람이 되겠다는 뜻으로 같은 이름 ‘진’을 쓰도록 하자”는 허웅배의 제안에 따라 모두 자기의 이름을 진으로 부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허웅배는 허진으로, 리경진은 리진으로, 한대용은 한진으로 이름을 개명하고 평생 그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천막생활을 이어간지 두 달이 지나서야 소련공산당은 그들의 망명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붉은색의 소련 공민증 대신에 녹색의 무국적 임시 거주증을 허가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한 음악대학 정추와 연극대학 맹동욱도 잇따라 망명했습니다. 이들의 망명사건은 웽그리아(헝가리)와 뽈스카(폴란드), 벌가리아(불가리아), 동도이칠란드(동독), 체스코슬로바키야(체코슬로바키아)등에서 공부하던 동유럽 유학생들의 집단망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중에는 서독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로 망명한 유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반대하고 자유롭고 민주주의적인 조국을 꿈꾸며 젊을 혈기에 결연히 항거했던 그들은 그렇게 그립던 고향땅을 마지막까지 밟아보지 못한 채 망명자라는 아픈 마음을 안고 타국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지난해 2015년 8월에 대한민국의 한겨레 신문의 박유리 기자가 첫 북한 유학생 출신 망명자들의 타향살이를 취재했습니다. 첫 유학생 망명자 8명 중에 현재 카자흐스탄 알마티시의 나보이 거리에 사시는 김종훈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를 통하여 뛰어난 수재들이었던 북한 유학생 망명자들이 이후 소련의 고려인 사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소련의 텔레비죤 방송과 고려극장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많은 활동과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유학생 망명자들의 기장 큰 공통점과 업적은 문화, 예술, 교육 분야에 종사하면서 해방 전 일제의 토벌을 피해 소련에 정착한 우리 민족, 고려인 사회에 한글문학을 유지,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것이었습니다. 고려극장의 극작가, 기자, 교수, 영화감독 등 직업은 다양했지만 이들은 모국어를 상실해 가던 동포사회에 한글문학을 전파한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고려극장의 극작가로 유명했던 한대용은 1931년에 평양에서 태어나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 러시아어과에서 공부하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입대하였고 휴전 이후에 모스크바 전연맹영화예술대학에 유학을 떠났고 망명 후 러시아 여성과 결혼하여 작가생활을 하면서 많은 작품을 창작하였습니다.

한대용의 부인인 지나이다 이바노브나는 당시 망명이유에 대하여 “조국은 지금 평안하지 못하다. 우리가 돌아가도 자유롭게 진리나 사실을 말할 자유가 없다. 저희 영화대학 유학생들이 이런 상황에 반대하여 망명을 결심했다”는 생전에 남편이 남긴 말을 전했습니다. 망명 이후에 종군기자 출신인 아버지와 인민군 출신인 여동생도 한대용에게 수차 편지를 보내 망명을 철회하고 돌아올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은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였던 것입니다.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으로 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겨났고 전쟁 후에는 종파숙청과 공포정치로 많은 유학생 망명자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김씨 일가의 세습독재에 항거한 북한의 인민들도 저처럼 목숨을 걸고 한국행을 택하고 있습니다. 김일성 봉건왕조 일가가 남긴 이산가족의 실상, 통일이 되면 반드시 밝혀질 것이며 그런 통일은 멀지 않아 곧 올 것이라 확신을 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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