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김일성의 가짜 머슴살이
2023.12.27
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 도서이며 북한 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많은 인물들과 지역, 사건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그 내용의 깊이를 파고들수록 우상화 선전을 위해 허구와 날조로 엮어놓은 가짜 역사 도서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5장 ‘무장한 인민’, 4절 ‘혈전의 준비’에서 김일성이 1932년 2월부터 3월 사이 1달 반 동안 푸르허 마을에서 머슴꾼으로 가장하고 마을주민들을 혁명화하였다는 부분을 기억하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조선의 별 제5부에서 머슴살이를 할 때 소달구지를 몰고 가던 김일성에 마을 아낙네들이 우물가의 얼음판을 까달라고 부탁하자 도끼로 얼음을 까면서 마을 여성들과 이야기하던 장면도 눈에 삼삼하게 떠올려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 혁명역사 과목에서도 1931년 12월 명월구회의 이후 안도지방으로 혁명 활동의 중심지를 옮겨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 사업을 착수하기 위해 두만강 연안의 넓은 지역에 공작원들을 파견하고, 김일성도 안도현과 돈화현 사이에 위치한 푸르허 마을에 머슴꾼으로 가장하고 침투했다고 배워줍니다.
북한 대외선전 언론매체인 ‘우리민족강당’의 기사 ‘푸르허 마을의 머슴이 되시여’에도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의 대중적 지반을 축성하기 위해 1932년 2월부터 3월사이 푸르허 마을에서 농촌혁명화의 실천적 모범을 창조하였다고 강조합니다.
이 기사에서는 여러 차례 이 마을에 공작원들을 파견하였으나 실패하자 김일성이 직접 머슴꾼으로 가장하고 이 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을 혁명적으로 교양하여 그 훌륭한 본보기를 일반화하도록 하였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당시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과 언론 매체의 보도 그리고 일제가 기록한 자료들을 종합하면 김일성의 머슴살이는 농촌 혁명화와는 거리가 먼, 반일혁명투사들을 희생시키고 살인자로 몰린 김일성이 죽음이 두려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머슴살이를 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오늘 시간에는 이 부분을 자세히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은 지난 시간 언급했던 내용 중에 김일성이 조선혁명군 3중대장이었던 심용준 중대의 무기를 훔쳐 달아났고, 1932년 2월 고동뢰 소대장이 이끄는 3중대 소속의 1소대원 9명을 김일성, 당시 김성주가 고발하고 무송의 한 여관에서 무참히 살해한 사건을 전해드렸습니다.
역사 전문가인 성균관대학교 이명영 교수가 1974년에 편찬한 도서 ‘김일성 열전 - 그 전설과 신화의 진상 규명을 위한 연구’에는 고동뢰 소대장이 무송으로 파견되었던 당시, 그 소대원 중 한 명인 김문빈의 친구이자 당시 국민부 총관 이병근의 아들 이시찬 씨가 증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장아청(張亞靑)과 함께 무송에 나타난 김성주는 권총을 휘두르고 다니면서 약탈을 일삼아 큰 문제를 일으켰다. 그들은 이 지방의 자기 또래들을 긁어모아 패거리를 지어 중국 사람들의 집을 털고 다녔다”는 내용이 실렸습니다. 여기서 장아청은 장울화의 가명이고 김성주는 김일성의 본명입니다.
책에서는 또 “당시 웬만한 중국 사람들은 대개 집에 경호용 총들을 갖고 있었는데 김성주 패거리들은 이것을 강탈해 무장 작당을 무어(모아) 군자금 모집을 한다며 돈을 털고 다니기 시작했다, 무송 일대의 중국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1931년과 1932년 사이의 겨울 동안 김성주 일당의 행패는 그치지 않았다”는 증언도 담고 있습니다.
1929년 5월에 만주 길림시 우마행호동거리의 국민부 사무소에서 반일 투사 지도자들이 모여 ‘조선혁명군’을 창건합니다. 당시 사령관은 이준식이었고 1중 대장은 양세봉, 5중 대장은 이종락이었습니다.
1930년 10월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임명되었던 현익철과 그 후임이 잇달아 일제에 체포되자 양세봉이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임명됩니다.
북한은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 골에서 김일성이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김일성은 독립군 조선혁명당 산하로 이미 1929년 창건된 조선혁명군의 지역 유격대 중 하나인 ‘안도 유격대’ 소속이었으며 이 유격대는 인원이 20명 정도 밖에 안 되는 소규모였다는 것이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북한에서 노동당 선전선동부가 압수하여 소각해버린 1960년, 노동당 역사연구소 소장이었던 림춘추가 쓴 도서 ‘항일무장투쟁 시기를 회상하여’에는 김일성이 1932년 4월 이영배, 김철희 등과 함께 안도에서 유격대를 조직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부풀려진 사실입니다. 중국 흑룡강성 당사연구소의 자료에는 안도 지방에 존재하던 반일 부대 중에는 안도 유격대라는 명칭의 부대가 없으며 안도 유격대라는 말도 북한에서 해방 후 왜곡해 만든 명칭이며 단지 18명의 김일성 패 청년들이 무장을 하고 군자금을 모은다며 비적 행위를 일삼았던 행위에 대한 기록만 존재합니다.
그러면 1932년 4월 이전에 김일성이 움직인 동선에 대해 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해 2월 초순, 조선혁명군은 혁명군의 무기를 갖고 도주한 김일성 패거리를 잡기 위해 3중대 1소대 고동뢰 소대를 파견하게 됩니다. 무송의 한 여관에서 김일성의 패거리들이 이들을 죽이고 소대원들의 무기를 탈취해 달아난 뒤 김일성의 행적은 묘연합니다.
김일성이 무송에서 달아난 뒤 즉 1932년 2월과 3월 사이의 거취는 역설적이게도 김일성의 회고록과 북한의 영화,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설명했던 푸르허 마을에서 머슴으로 위장해 살았던 것입니다.
‘세기와 더불어’에는 김일성이 안도에서 돈화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푸르허 마을에서 1932년 2월과 3월 사이 머슴으로 위장하여 생활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회고록에는 김일성이 주민들의 혁명화를 위해 했던 행보보다 머슴꾼 흉내를 내면서 했던 행위들이 더 자상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패는가 하면 얼굴에 검댕이를 묻히고 허줄한 덧저고리를 입고, 이른 아침 주인집 물을 긷고 나무를 패고 마당을 쓸고 소여물을 끓였다고도 했습니다. 우물 터에 얼음이 얼면 동네 아낙네들의 부탁을 들어 얼음도 깠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들은 밀정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상 독립군의 총을 탈취해 쫓기다가 머슴으로 가장하여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마을에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이 시기 만주 지역의 주민들은 일제가 이렇게 작은 마을까지 밀정을 박아 넣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 증언합니다.
한반도의 공산화를 꾀하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6.25남침전쟁을 일으켰던 김일성, 그의 동족 살인 행각은 사실상 10대의 어린 나이부터 시작됐는지 모릅니다. 또 전쟁 이후에도 56년 8월 종파 숙청, 1967년 국내파 숙청, 1970년대 초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빙자한 살인적인 처형과 추방으로 이어졌고 1990년대 말 보위사령부검열과 수 없는 주민들의 공개처형 등 아들과 손자까지 대를 이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다른 무고한 사람들을 수없이 죽이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역대 선대들의 죄값까지 치르면서 동족 살인의 책임을 지을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