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한국전 직후 월남한 실향민의 애환 담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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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북한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입니다. 진행에 미국 워싱턴의 홍알벗입니다.

오늘도 남한 서울의 탈북 소설가 도명학 선생님과 함께 남북한 문학작품에 대해 이야기 나눕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도명학: 네, 안녕하십니까.

MC: 선생님, 오늘은 어떤 작품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도명학: 네 오늘은 시 두편입니다. 한편은 박봉우 시인의 "휴전선"이고, 다른 한편은 구상 시인의 연작시 "초토의 시" 중 "적군묘지 앞에서"라는 시입니다.

MC: 이 시들을 고르신 이유는 뭔가요?

도명학: 지난 6월이 6.25 전쟁 발발 73주년이 되는 달이었고, 이달은 휴전협정 조인 70주년이 되는 달입니다. 휴전된지 오래됐지만 전쟁의 상흔은 아직도 남아있고, 언제 다시 전쟁이 재발할지 모르는 군사적 긴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 "휴전선"과 "적군묘지 앞에서"가 이런 의미를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인 것 같아 골랐습니다.

MC: 첫번째 시 '휴전선'을 살펴 볼까요? 시부터 먼저 들어 보시겠습니다.

<휴전선>

박봉우 시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姿勢)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高句麗) 같은 정신도 신라(新羅)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意味)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廣場).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休息)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 같은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어야 하는가. 아무런 죄(罪)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姿勢)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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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고아들이 트럭으로 실려와 서울의 한 고아원에 내리기 직전의 모습(1950년 11월 2일)의 사진.

MC: 작가 박봉우 시인은 어떤 인물인가요?

도명학: 네, 박봉우 시인은 남북 분단의 아픔과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작품을 많이 써낸 시인입니다. 1934년에 출생해 1990년에 생을 마쳤습니다. 추풍령이라는 호를 쓰셨고.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고등학교를 거쳐 1959년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문단에 등단한 것은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이 당선되면서인데, 바로 오늘 소개하는 시입니다. 그의 시들은 분단 조국의 현실을 날카로이 응시하고 통일의 염원을 노래한, 한마디로 박봉우 시인은 분단 비극의 시인 또는 통일지향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1962년에 전라남도문화상·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시집으로는 “휴전선”,“4월의 화요일”, “황지의 풀잎”, “서울하야식”,“딸의 손을 잡고”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시인의 사랑”이 있고, 사후에는 『박봉우 집중연구』로 그의 문학과 생애가 집중 조명되었습니다.

MC: 이 시를 처음 접하셨을 때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도명학: 네. 이 시는 한국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암울하기만 했던 1950년대에 쓰여진 작품입니다. 전쟁 직후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많았던 만큼 이 시가 시대정신을 반영한 시로 주목 받았을 것입니다. 저도 고향을 북에 두고 온 탈북민으로서 시 "휴전선"의 구절구절들이 마음속을 아프게 파고 들었습니다. 저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혹시 시인이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는데 그렇진 않더군요.

MC: 박봉우 시인이 '휴전선'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도명학: 시구절에도 있지만 남과 북이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 대치하고 있는 '쌀쌀한 풍경'의 휴전선은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만큼 불안하여 언제든 전쟁의 형태든 혁명의 형태든 '천둥같은 화산'이 터질 것만 같은 상황이고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아무 준비 없이 '꽃'처럼 가만히 서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 이 시의 메시지라고 생각됩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또다시 겪을 수는 없다는 시인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진 않지만,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라는 말 흐림 속에서 시인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을 읽을 수 있습니다.

MC: 두 번째 시 '초토의 시, 구상'을 또 살펴 볼까요? 먼저 시의 일부분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 적군 묘지 앞에서 - 초토의 시 8>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워 있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들어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곳에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면

가로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砲聲)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MC: 이 시를 처음 접하셨을 때 느낌이 어떠셨나요.

도명학: 참담한 느낌과 함께 북한당국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적군묘지라고 하면 북한에서 이 방송을 듣는 청취자들은 무슨 말인지 모를 것입니다. 아마 한국인들을 비롯한 세계인들 중에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에 있는 적군 묘지는 6.25한국전쟁 때 교전 중에 전사한 북한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유해를 한국 정부가 국군 유해 발굴 과정에 발굴되면 묻어주는 묘지입니다. 이것은 포로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정을 충실히 집행하려는 한국 정부의 조치로 세계전쟁사에 유례가 없다고 합니다. 한편 한국정부는 북한군이 적이긴 해도 동족이고 그들에게도 혈육이 있으니만큼 북한당국이 유해 송환을 요청하거나 아니면 통일이 된 후에라도 혈육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인도주의적 동포애적 차원에서 경기도 파주시에 묘역을 조성하여 개인별로 안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발굴된 유해에서 채취한 유전자는 보관했다가 통일 후 북한에 있는 혈육들과 유전자 검사를 통해 만날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제가 분노하는 것은 남한은 적군 유해임에도 이렇게 해주는데 왜 북한당국은 인민군 전사자 유해를 찾아가려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중국도 2014년에 한국 정부와 협의해 중국인민지원군 유해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북한당국은 찾아가라고 해도 묵묵부답 모른 척 합니다. 저들이 일으킨 전쟁에 아까운 청춘들을 내몰고도 죽으면 개가 죽은 것보다 못하게 여기는 건지, 정말이 치솟는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MC: 이 시를 쓴 구상 시인은 어떤 인물이고 작가가 또 이 시를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뭘까요?

도명학: 구상 시인의 본명은 구상준입니다. 시인은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유년 시절은 함경남도 원산에서 보냈습니다. 시인의 어머니는 한문 고전과 평민 소설, 시조를 두루 섭렵한 고전적인 인텔리로, 그가 네 살이 되자 천자문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동몽선습, 명심보감, 고시조, 옥루몽, 삼국지연의 등을 배운 시인은 그 영향으로 보통학교 시절 조선어와 작문과 화법시간에 특히 흥미를 느꼈다고 합니다. 시인은 도쿄로 밀항해 니혼대학 종교과에 입학했는데, 이 때 학점을 받기 위해 습득한 불교 지식이 평생 시인을 받쳐줄 마음 속 깊은 자양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구상 시인의 시 세계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배운 고전문학과 집안의 기독교적 분위기, 대학 시절 배운 불교 지식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습니다. 시인은 광복 후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시집 『응향』에 게재한「길」, 「여명도」등이 공산당으로부터 비판받게 되자 월남하였습니다. 6·25 전쟁 때는 남한에서 종군작가단 부단장을 지냈습니다. 시인은 86세 되던 해 2004년 5월 11일에 폐질환으로 사망했습니다.

구상 시인은 시 “적군묘지 앞에서”를 통해 모든 것이 전쟁으로 황폐해진 초토로 변했지만 인간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감정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적군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과 북의 화해 가능성도 엿보이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분단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마지막 행에 나오는 구절 “울려오는 포성 몇 발”은 남북이 여전히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동포로서의 사랑과 함께 적으로서의 미움을 지녀야 하는 현실에 대한 시인이 절망이죠.

MC: 이 두 시를 읽으시면서 가장 감동을 받은 부분은 어디 어디인가요?

도명학: 네 저는 이 대목이 제일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욱 너그러운 것이로다.

MC: 이 두 시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서로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도명학: 둘 다 동족상잔과 분단의 비극, 남북화해와 통일에 대한 염원을 토로하고 있다는 점이 공통점이고, 다른 점은 시 '휴전선'은 총부리를 맞대고 대치 상황에 있는 휴전선에 대한 시적 묘사를 통해 통일을 갈망하고 있는데 반해 시 '적군묘지 앞에서'는 죽은 적군의 유해가 묻힌 묘지를 두고 느끼는 동포애와 적에 대한 미움이 교차하는 모순되고 착잡한 감정을 통해 분단에 대한 안타까움과 화해에 대한 의지를 피력하고 있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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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7월 한국에 파병된 미 제2사단 장병들이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이 수용됐던 북한 벽동의 '5번 포로수용소'를 본뜬 모의 훈련장에서 5시간에 걸친 혹독한 '죽음의 행군' 훈련을 받고 있다. / AP

MC: 전체적인 감상평 부탁드립니다.

도명학: 두 편의 시가 다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시들이 1950년대에 나왔지만 여전히 가치 있는 작품으로 전해지는 이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분단과 대치상황이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시 "휴전선"는 교과서에도 실린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그 정도면 작품성이 상당하다고 평가되기 때문이겠죠. 통일이 되어 이런 시들이 추억의 시로만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1950년대나 2020년대나 이 시에서 토로하는 절규가 현재형이라는 생각에 참 마음이 무겁습니다.

MC: 네, 저희가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선생님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도명학: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MC: 저희는 다음 주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에디터: 이진서, 웹담당: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