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김일성 면전에서 대든 북한 소설가
2024.09.21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서울에 탈북 소설가 도명학 작가와 함께 남북한 문학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시간입니다. 저는 미국 워싱턴의 홍알벗입니다. 오늘도 도명학 작가와 전화 연결돼 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도명학: 네, 안녕하십니까.
MC: 지난 시간, 월북작가와 카프(KAPF) 출신작가에 대해 알아 봤는데요. 주어진 시간에 다 다루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북한에서 이름을 날렸던 월북 그리고 사회주의 문학작가와 그 작품세계를 중심으로 대화 나누겠습니다. 지난 주에 선생님께서는 가장 유명했던 월북작가로 이기영 작가를 꼽으셨는데요. 당시 이기영 작가가 보여젔던 활동을 먼저 간단하게 소개해 주시죠.
도명학: 이기영 작가의 월북 후 활동에 대해 아쉽지만 제가 아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이기영 작가와 동시대인이 아닌 세대인 데다 제가 문학창작을 공부하던 시기엔 이미 이기영 작가는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고 있었고 북한 작가동맹 위원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곤 하지만 명예직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할지 실제 업무는 부위원장들이 수행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저로선 이기영 작가와 개별적으로 만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작가가 된 후에도 이기영 작가에 대해 연세 많은 작가들 이야기를 통해 들었을 뿐입니다.
이기영 작가는 월북 후 처음에는 굉장히 열정적으로 창작하는 한편 북한문단을 발전시키기 위해 작가후비 양성에 특별히 노력했다고 합니다. 창작기법을 가르치는 글들도 많이 썼는데, 저도 이기영 작가가 글감을 어떻게 잡으면 좋은지, 또 글감을 찾았으면 그것을 어떻게 작품화 하면 좋을지를 아주 자세하게 본인 경험을 곁들여 쓴 책들을 종이가 닳아 보풀이 일도록 읽으며 공부했습니다. 지금 제가 소설을 쓸 때 활용하는 기법들도 상당 부분 이기영 작가의 책들을 통해 터득한 기법들입니다.
이기영 작가가 북한에서 창작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장편소설 “땅” 과 “두만강”입니다. 그중에도 “두만강” 3부작으로 된 방대한 양입니다. 이 소설은 1951년부터 10년간 집필한 대작으로 1954년에 1부를, 1957년에 2부를 발표하고 1961년에 3부를 완성하여 발표하였습니다. 원고지 1만 매가 넘는 대장편으로, 발표 후 북한당국으로부터 인민상을 수상하였고, 북한 문학사에 ‘근세 우리 인민의 반침략ㆍ반봉건 투쟁 역사를 전개, 화폭 속에서 폭넓게 형상한 데서나 역사소설의 면모를 갖춘 데서나 해방 후 소설문학이 거둔 의의 있는 수확의 하나’라고 기록되었을 정도입니다.
이기영 작가는 북한에서 문학예술부문 활동 외에도 남한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 부위원장이라는 최고위직도 지냈고 외교 부문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MC: 김일성 주석 등 북한 지도부에서도 이기영 작가를 굉장히 우대해 줬다죠?
도명학: 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월북 후 김일성이 직접 의식주 걱정 없이 문학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챙겨주었을 정도로 우대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거기다 이기영 작가는 북한에서 문학예술부문 활동 외에도 남한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 부위원장이라는 최고위직도 지냈고 외교 부문에서 활동하기도 하는 등 당국의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MC: 그런데,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사이에서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면서 절필했다고 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도명학: 네, 그런 일이 있습니다. 김정일이 김정은의 생모인 고용희와 사귀기 전에 동거했던 여성 성혜림과 관련된 일입니다. 몇해 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 공항에서 독극물에 살해된 김정남, 그러니까 김정일의 장남을 낳은 생모가 성혜림입니다. 문제는 성혜림이 김정일과 사귀던 시기 성혜림은 이미 아이와 남편까지 있는 유부녀였다는 데 있습니다. 거기다 시아버지가 이기영 작가였습니다. 그러니까 김정일이 이기영 작가의 며느리를 억지로 이혼시킨 건데 이기영 작가가 얼마나 기막히고 기분 나빴을지 뻔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일성의 후계자인 김정일이 그런 패륜을 저질렀으니 더 말해 뭘하겠습니까. 그때부터 이기영 작가는 절필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치욕을 당하고 펜을 잡은들 글이 나오겠습니까. 그 당시 성혜림과 친구 사이로 지냈던 탈북 여성 김영순이라는 분이 김정일과 성혜림이 사귀던 때 이야기를 쓴 책이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라는 책인데 거기에 보면 당시 상황이 생동하게 소개돼 있습니다.
MC: 지난 시간에 선생님께서 이기영 작가의 작품 가운데 장편소설 '두만강'을 추천해 주셨는데요. 어떤 작품인가요?
도명학: 이 소설 1부는 19세기말에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는 1910년까지 내용이고, 2부는 1910년부터 3ㆍ1운동까지, 3부는 1920년대초부터 민족해방투쟁이 무장투쟁으로 발전하는 1930년대초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부에서는 충청도 두메산골 송월동의 가난한 농민 박곰손의 봉기와 의병투쟁, 애국적 지식인 이진경의 애국계몽운동 등 봉건주의에 대한 투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2부에서는 1910년 무렵부터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전후의 송월동, 함경북도 무산 7소, 만주의 동북지방이 중심무대로서 운동의 세대교체와 새로운 민족해방투쟁의 성장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3부는 1920년대 초 노동자계급의 영도하에 민족해방투쟁이 시작되는 시기부터 1930년대 초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이 시작되는 시기에 이르는 기간을 송월동, 무산 7소, 만주 동북지방, 그리고 일본을 무대로 하여 펼쳐지면서 등장인물 씨동이를 주축으로 하는 새로운 노동자 계급이 민족해방투쟁 활동을 벌이다 항일무장투쟁 근거지로 향하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MC: 다음은 한설야 작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요? 지난 시간에 방송을 듣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한설야 작가가 어떤 인물인지 간략하게 소개해 주시죠.
도명학: 네, 한설야 작가는 북한 문단에 큰 업적을 남긴 작가였습니다. 함흥에서 출생하였고, 1915년 서울에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고향 함흥에 돌아가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한설야는 중국과 일본에서 유학한 뒤 1925년 이광수의 추천으로 첫 작품 “그날 밤”을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그는 1927년 카프 창립 초기부터 가담하여 계급문학의 이론적 확립과 문학적 실천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다 1934년 다른 카프 문인들과 일제 경찰에 의해 검거되는데, 이 시기를 전환점으로 그의 창작은 보다 두드러진 계급투쟁 성향을 나타내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장편소설 “황혼”에서는 당대 자본가의 삶과 노동자의 삶을 대조적으로 형상화했습니다. 일제강점기 한설야는 두 차례 투옥되었습니다.
광복 후 월북한 한설야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함경남도 대표,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부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하는 등 정치적인 성공을 누렸습니다. 한국 전쟁 이후에는 조선작가동맹 위원장을 지내면서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 남로당 계열 월북 문인들의 숙청을 주도한 뒤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을 지내고 교육상과 인민상을 수상하고 1957년에는 내각 교육,문화상에 임명되는 등 성공 가도를 달렸으나, 1962년 《문학신문》에 연재하던 시조가 돌연 중단되고, 한설야와 가까이 지내던 안막, 서만일, 신불출, 임선규, 현덕, 박팔양, 민병균 등 월북 작가 예술인들이 대거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습니다.
MC: 선생님께서는 지난 시간, 카프 출신인 한설야 작가의 장편소설 '황혼'을 추천해 주셨는데요. 이건 어떤 작품인가요?
도명학: 소설 ‘황혼’은 한설야가 일제강점기 때 창작발표 한 것인데 월북 후 북한에서 다시 개작해 발표했습니다. 소설은 노사갈등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투쟁 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인데.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소설의 등장 인물 박여순은 서울에 올라와 자본가 김재당 집에서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학업을 이어갑니다. 이 무렵 자본가 김재당은 사업이 파산지경에 빠지자 금광으로 갑부가 된 안중서에게 방직 공장을 넘기는 한편, 안중서의 딸 현옥과 자신의 아들 경재의 결혼을 서두릅니다. 그러나 경재는 약혼자이자 사상적 동지였던 현옥이 점차 물질적 향락을 좇는 속물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건실한 모습을 간직한 가정교사 박여순에게 호감을 보입니다.
한편 박여순은 졸업 후 가정교사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지만 경재의 주선으로 안중서가 경영하는 방직 공장의 개인 비서로 취직하게 됩니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는데. 이런 와중에 박여순은 사장 안중서에게 겁탈당할 뻔한 사건을 겪는데, 그 후 경재가 보여준 미온적인 태도와 주위의 압력 등에 의해 경재를 떠나갑니다. 박여순과의 결합이 수포로 돌아가자 경재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현옥과의 결혼을 받아들이고 현실순응주의자가 되어갑니다. 박여순은 안중서 방직 공장의 노동자가 된 동향 친구 준식의 주선으로 회사 직공으로서 새 삶을 시작합니다. 안중서는 박여순을 회유하여 노동자의 동태를 탐지하려고 하나 박여순은 이를 거절합니다. 한편 조직적인 노동 활동을 선도하며 노조 지도자로서 위치를 굳힌 준식은 낙범, 기태, 형철 등과 힘을 합쳐 생산력 증강과 산업합리화 방안을 내세워 감원을 실시하려는 회사와 대항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 대립은 감원을 위해 실시하려던 건강 진단을 계기로 마침내 폭발합니다. 준식, 여순, 형철은 회사 측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고 담판을 짓기 위해 사장실로 몰려가고. 경재는 사장실로 들어오는 이들과 마주친 후 어두워 가는 황혼에 선 자신 처지를 떠올리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MC: 그런데, 한설야 작가가 당시 북한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최강 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에게 대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걸 북한 주민들도 알고 있나요? 어떤 내용인가요?
도명학: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습니다. 작가들 중에도 신세대 작가들은 대개 모를 것입니다. 그만큼 오래전 일이고 더욱이 숙청된 한설야 작가의 명예가 복권돼 애국열사릉에 묻혔을 정도기에 한설야 숙청에 관한 이야기는 감히 해서는 안 되는 말이 되었기에 더구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설야 숙청 이유에 대해 남한에서는 문인들 간 갈등에서 비롯된 정치적 숙청으로 보던데, 제가 북한에서 알고 있던 이유는 다릅니다. 1960년대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국가들에서 창작에서 개성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면서 문학예술에 대한 공산당의 간섭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데 북한만은 문학예술에 대한 당의 영도를 오히려 더 강화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한설야가 심지가 굳은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김일성을 만난 자리에서 “수상님, 작가들이 글 쓰는 일에 너무 간섭하면 글을 잘 쓸 수 없습니다.”하고 대꾸한 괘씸죄로 숙청된 것입니다.
MC: 한설야 작가는 용감한 건가요, 아니면 무모한 걸까요? 오늘 날에는 왜 한설야 작가 같은 사람이 없는 걸까요?
도명학: 저는 한설야 작가가 대쪽 같은 성품의 소유자여서 화를 당했다고 봅니다. 한설야를 비롯한 카프 출신 작가들의 대쪽 같은 성품에 대해선 김일성도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일제가 아무리 탄압하고 회유해도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고, 차라리 펜을 꺾으면 꺾었지 일제에 협조하는 글은 절대 쓸 수 없다며 산중에 들어가 옥수수 농사를 하며 지냈을 정도로 저항 의식이 높았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런 것으로 봐선 한설야 작가가 문학창작의 자유를 억제하는 당적 지도 강화에 굴하지 않고 자기 성품대로 발언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에 있을 때 연세 많은 노작가 한분이 저에게 얘기하기를 한설야가 앞에서 말한 그 발언 외에 더 심한 발언도 했다고 합니다. 한설야 작가가 글을 계속 쓰지 않는 것을 보고 다른 작가들이 왜 글을 안 쓰냐고 물었더니 “난 배부른 자들을 위한 글은 안 써” 했답니다.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선택한 사회주의 북한이 이상하게 변질된 독재 체제가 되어 가는 현실을 그런 식으로 불만을 터뜨렸던 거죠.
한설야 같이 용감한 사람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은 한설야가 숙청되던 시기는 그 이후 시기에 비해 양호한 시기였습니다. 처벌도 상대적으로 관대했고 아직 김일성 1인 독재 체제가 완벽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되죠. 회의장에서 졸았다고 총살하는 정도인데 누가 감히 대들겠습니까.
MC: 이기영 작가와 한설야 작가가 만일 지금까지 살아있다면,그리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선생님께서는 이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신가요?
도명학: 할말이 참 많을 것입니다. 문학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사회주의 이념이 왜 잘못된 것인지, 월북한 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운 선택이었는지, 장차 민족의 미래와 통일은 어떻게 될 것인지 등 할말이 끝도 한도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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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도명학: 네, 수고하셨습니다.
MC: 청취자 여러분,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