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북 주민도 공감할 고은 시인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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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시간입니다. 이 시간 진행에 홍알벗입니다. 오늘도 탈북작가 도명학 선생님과 함께 남한의 문학작품을 읽고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도명학: 네, 안녕하십니까.

MC: 선생님, 오늘은 어떤 작품을 소개해 주실 건가요?

=>도명학: 네. 한국에서도 유명하고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으며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번 물망에 올랐던 고은 시인의 시 "길"을 가지고 이야기하려 합니다.

MC: 이 시를 고르신 이유는 뭔가요?

=>도명학: 이 시의 제목이 "길"이잖습니까. 평범한 제목이지만 저는 길이라는 명사가 가진 의미가 인간 생활에 있어 아주 상징적 의미가 짙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내용도 구구절절 무거운 철학적 의미가 느껴지면서도 정서가 짙고요. 또 이 시가 제가 살아온 인생을 반영한 듯 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북한주민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더군요. 물론 시인이야 북한을 의식하고 쓴 시가 아니겠지만 북한주민들이 읽는다면 나름대로의 메시지를 받아안게 될 것 같아 골랐습니다.

MC: 시인 고은 선생님은 워낙 유명한 분이시죠. 제가 미리 이 고은 시인에 대해서 찾아 봤는데요. 북한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들을 위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시인 고은은 1933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났습니다. 1952년에는 군산의 동국사에서 출가해 '일초'라는 법명을 받고 불교 승려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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πŒ¡∑πÆ«–¿€∞°»∏, º≠øÔ ∏∂∆˜ ∞ʬ˚º≠ ø¨«‡ 1989년 남북 작가 회담 예비회의에 참석하려던 고은 시인(가운데)과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들. (YNA)

이후 10년간 경기도 강화 전등사 등의 사찰에서 참선과 방랑을 거듭하며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요. 1958년 조지훈과 장만영과 서정주의 공동 추천으로 인하여 《현대문학》에 〈폐결핵〉이란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1960년대 초에 불교신문사 주필 등을 지냈고,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을 내고 1962년 환속하여 본격적인 시작활동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고은의 문학적 성향은 시 〈문의 마을에 가서〉를 낸 1974년을 기준으로 크게 둘로 나뉘는데, 그의 전기 시들은 허무의 정서, 생에 대한 절망, 죽음에 대한 심미적인 탐닉이 주를 이루는 반면 후기 시들은 시대상황에 대한 비판과 현실에 대한 투쟁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고은 시인은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자주 거론되는 한국의 몇 안되는 시인이기도 합니다.

MC: 선생님께서는 고은 시인과 개인적인 만남 또는 친분이 있으시나요? 북한에 계실 때부터 이 고은 시인을 아셨나요?

=>도명학: 개인적 친분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2012년 개최된 전세계 문인들의 국제적 조직인 국제펜클럽 제 79차 대회 때 만났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린 것 같은데 바로 그 대회에서 탈북작가들로 구성된 국제펜클럽 망명북한펜센터가 145번째 회원국 자격으로 가입하게 됐죠. 그때 이문열, 고은 등 한국의 유명작가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저도 패널로 토론을 했었고 고은 시인도 처음 거기서 만났습니다. 연세가 많음에도 상당히 마음은 젊고 활달하면서도 지성미가 느껴지더군요. 그 후 수차에 걸쳐 여러 문인 행사에 참가할 때면 뵐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고은 시인을 전혀 몰랐습니다. 글쎄 대남선전문학에 관여하는 작가들은 알았을지 모르지만 당시까지 저는 문학의 이등병 같은 처지여서 고은 시인에 대해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MC: 그럼 오늘 소개해 주실 고은 작가님의 '길'이라는 시를 들어 보시겠습니다. 오늘은 제가 낭송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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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길

시인: 고은

길이 없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숨막히며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미래의 험악으로부터

내가 가는 현재 전체와

그 뒤의 미지까지

그 뒤의 어둠까지이다

어둠이란

빛의 결핍일뿐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다

그리하여

길을 만들며 간다

길이 있다

길이 있다

수 많은 내일이 완벽하게 오고 있는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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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시를 읽어드렸지만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이 시는 어떤 시인가요?

=>도명학: 네, 자주 말씀 드리는 거지만 한국 시가, 특히 좋은 시라고 평가받는 시들이 대개 난해합니다. 이 시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만 다른 시들에 비하면 이해하기 너무 어려운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MC: 이 시에서 볼 수 있는 '길'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도명학: 시를 들어보시고 느낌이 받으셨을 것 같은데요. 길이 단순히 지리적 길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흔히 사람들이 인생길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까. 바로 그 인생길을 철학적으로 서정적으로 형상한 것이고, 또는 한 인간의 생을 떠나 사회적 문제를 제기한 시라고도 볼 수 있죠. 절망과 희망, 좌절과 노력, 결핍과 창조 등으로 온갖 희노애락이 반복되는 것이 인생길입니다. 아마도 시인 자신이 살아온 파란만장한 삶의 고비들과 수많은 고뇌가 이 시에 녹아있다고 보여집니다.

MC: 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길'과 '희망'이란 단어가 반복됩니다.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요?

=>도명학: 시인은 숨 막히는 현실을 새로운 미래가 밝아오는 전 단계인 듯 낙관적인 의지를 드러내 토로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시에서 토로 되는 길은 현재의 어둠이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야 하는 노정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MC: 이 시를 북한 주민들이 읽는다면 적게나마라도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시를 읽은 북한 주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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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평양을 방문한 고은 시인. /연합

=>도명학: 네, 그래서 더구나 제가 오늘 이 시를 고르게 된 거죠. 왜냐면 제가 이 시를 남한에 와서 접한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읽었더라면 단숨에 외워버렸을 것입니다. 시의 구구절절이 어쩌면 북한에서의 저의 삶을 묘사한 것 같이 마음에 대번에 와닿았습니다. 시를 지으신 고은 시인도 그랬겠지만 저도 북한 사회 현실에 절망도 느껴보고 때로는 희망도 가져보고, 그러다 다시 좌절도 했으니까요. 저는 북한이 동구권처럼 변화되기를 일일천추로 갈망했습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더 캄캄한 어둠이 짙어갔고, 결국은 탈북을 선택한 것입니다 시에서 표현했듯 길이 없으니 길을 만든 거죠. 탈북자의 길 말이죠. 그리고 북한 민주화와 같은 거대한 사안이 아니더라도 북한주민들 개개인의 삶 자체가 매일 매순간 억척같은 의지와 인내와 노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때문에 아마 이 시를 좋아할 것입니다. 조금 이해가 어려운 점은 몇 번 반복해 읽다보면 감이 잡히겠죠.

MC: 이 시 말고도 고은 시인은 '길'이라는 소재로 다양한 시를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직 가지 않은 길'과 같은 작품도 있는데요. 이 시도 한번 들어 보시죠.

<시낭송: '아직 가지 않은 길' 고은, 이승배 낭송, 유투브채널 '시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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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직 가지 않은 길

시인: 고은

이제 다 왔다고 말하지 말자

천리 만리 였건만

그동안 걸어온 길 보다

더 멀리

가야할 길이 있다

행여 날 저물어

하룻밤 잠든 짐승으로 새우고 나면

더멀리 기야할 길이 있다

그동안의 친구였던 외로움 일지라도

어찌 그것이 외로움뿐이였으랴

그것이야 말로 세상이었고

아직 가지 않은길

그것이야 말로

어느 누구도 모르는 세상이리라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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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고은 작가가 이 '길'이라는 것을 통해 나타내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도명학: 제가 보기엔 이 시가 나왔을 당시 시대적 환경으로 미루어볼 때 시에서 사용한 길은 사회의 민주화를 이루어가는 노정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평가일지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시에서 개인적인 꿈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할 세상을 부르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세상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민주주의가 실현된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MC: 선생님께서 이 시를 처음 접하시고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도명학: 북한 시인들도 이런 시를 쓸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더군요.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쓸 수 없었으니까요. 원고지에 몰래 끄적거려 보긴 했지만 절대 지면에 발표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누구에게 읊어줄 수조차 없는 사회가 북한이었으니까요. 한편 이 시를 읽고 고은 시인의 중량감이 재삼 느껴지더군요.

MC: 오늘 청취자 여러분과 함께 한 시 '길'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구절 한군데 소개해 주시죠.

=>도명학: 네, 저한테 특별히 다가오는 구절은 시 전반부에 나오는

“길이 없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숨막히며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이 대목에 뭉클해집니다. 이 대목만 뚝 따서 제목을 “탈북”이라고 붙여도 별도의 시 한편이 될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듯 저는 북한에서 희망의 길이 없어 스스로 만든 길이 탈북행이죠. 압록강을 건너 중국대륙을 힁단하고 동남아국가들을 경유해 다시 멀리 하늘 길을 에돌아 자유대한민국까지 온 길이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MC: 네, 도명학이 남북문학기행, 오늘 순서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선생님,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도명학: 네, 수고하셨습니다.

MC: 함께 해 주신 청취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기자 홍알벗, 에디터 이진서, 웹담당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