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 저는 10번 다시 물어봐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저는 10번 다 넘었을 거예요.
한옥정: 제가 지금 20살인데 그때 상황이라면 저는 안 와요.
한용수: 당연히 오지 않겠어요?
김혜성: 솔직히 말하면 안 옵니다.
김주찬: 다시 선택하여도 다시 탈북을 할 것 같아요.
김은주: 근데 저희는 선택이 없었어요. 탈북은 살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어요.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예진입니다. 탈북민들은 이제껏 귀순자, 북한이탈자, 새터민, 탈북자, 북한이탈주민 등 시대마다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바뀌어 온 호칭만큼이나 국가와 사회, 사람들에게 다른 대접을 받아왔죠. 30년 전까지만 해도 간첩 취급을 받던 탈북민들, 지금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쯤 되는 국회의원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사이 탈북민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탈북부터 한국정착까지, 그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그들의 속얘기를 들어봅니다.
한용수: 제가 북한에서 딱 산 날을 계산해 보면 만으로 20년 하고 12일을 살았어요. 군대에 와보니까 제일 충격적인 거는 막 영양실조에 걸리는 거예요. 인민군대인데… ‘인민군대가 못 먹어서 영양실조 걸리는 게 이게 말이 돼? 사회가 뭐 잘못된 거 아니냐?’ 뭐 이런 생각이 굉장히 많이 드는 거예요, 그때부터. 그 당시에 또 6월이니까 뭐 먹을 수 있는 것들도 별로 보급이 잘 안 됐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나물 채취하러도 가야 되고 그래서 그날 처음 저한테 나물 채취해 오라는 임무를 준 거예요. 그날은 내가 아침에 나와서 저녁에만 복귀하면 돼요. 그래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나를 찾을 사람이 없는 거죠. 오늘 아니면 내가 도망갈 기회가 없을 수도 있겠다…
1995년 6월 13일, 한국의 신문마다 ‘북한군 1명이 군사 분계선을 넘어 귀순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게 바로 현재 서울교통공사에서 기관사로 일하고 있는 한용수 씨인데요. 고난의 행군 시기 군대에서 배급되는 식량이 점차 줄어들자 북한 체제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용수 씨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손쉽게 38선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저 갈대 하나를 손에 들었을 뿐이죠.
한용수: 그러니까 비무장지대라는 게 6.25 전쟁 끝나고 1953년부터 사람이 들어가서 관리가 안 됐던 지역이잖아요. 그러니까 갈대를 하나 가지고 결국 가운데로 가는 거예요. 앞으로 쑥쑥 돌리면 그 줄에 딱 걸리면 기타 줄 튕기듯이 칭하고 소리가 나거든요. 보면 가느다란 줄이 쫙 있어요. 양쪽에 지뢰가 딱 있고, 그러면 거기를 이렇게 줄만 넘어가면 지뢰를 안 건드리고 가니까 좀 좁은 계곡에서는 그렇게 갈대 돌리면서 오고… 계곡이 좀 오다가 넓어지게 되면 큰 돌들이 이렇게 쭉 징검다리처럼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큰 돌들을 밟으면 되는 거예요. 그냥 흔히 생각하는 38선 하면 막 철책같이 착 그어지고 막 이럴 줄 아는데 실제 38선은 다 쓰러져 있어요. 막 구분도 잘 안 되고요. 풀도 막 자라서 구분도 잘 안 되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38선을 한쪽은 남쪽, 한쪽은 북쪽 이렇게 밟고 서 가지고… 갈까? 한 발 옮기면 남쪽이고 한 발 옮기면 북쪽이고 했는데 갈까? 다시 돌아갈까? 오는 과정 중에 거기에서만 한 30분 이상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일단 가자.
PD: 호기심이 많을 나이긴 해서 그랬을까요?
한용수: 호기심도 많았고 따지고 보면 뭐 철도 없었고요.
그렇게 호기심 반 망설임 반으로 시작된 용수 씨의 탈북은 한국 군인들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북한 군인이 잡아가 달라고 초소 문을 두드렸으니까요.
한용수: 한국군 GP에 도착하기까지 한 3시간이 걸렸거든요. GP 문 앞에서 담배를 한 2가치를 피웠어요. 피우다 보면 누가 나오지 않을까 하고…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문을 두드렸죠. 그랬더니 병사가 한 명이 나와서 딱 본 거예요. 그래서 내가 저기서 왔으니까 문 좀 열어주라고 했더니 막 도망을 가요. 또 그래서 ‘아 나 빨리 잡혀야 되는데 왜 안 잡아주는 거야’ 막 그러고 그 다음에 소대 병력이 나와서 문 열어주고 해서 들어갔죠. 한국군 병장이 저한테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몇 살이에요?’ 그러고 ‘20살입니다’ 그랬더니 ‘나이 어리네요’ 그러면서 ‘군생활 얼마나 했어요?’ 그러더라고. 그래서 ‘34개월 했어요’ 했더니 병장이 ‘저보다 많이 하셨네요’ 그래요. ‘한국군은 얼마나 복무하는데요?’ 그랬더니 26개월 한다는 거예요. ‘26개월짜리 군대가 있나, 세상에? 군대는 다 10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뭐 이런 생각. 막 도착해서 보는 매 순간 순간들이 저한테는 다 쇼킹한 것들이었어요.
용수 씨처럼 갈대 하나를 들고 손쉽게 탈북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대부분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는 것부터 시작하죠. 탈북민들에게 기나긴 탈북 과정은 지금도 악몽처럼 뚜렷합니다.
노경미: 두만강 장사꾼이 있어요. 두만강을 건너게 해주고 돈을 받는… 애기 엄마가 우리를 돈을 받고 건너게 해주는 때였는데 내가 그때 돈 천원이 있었어요. 근데 그 천원 가지고 원래는 못 건너요.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우리를 보니까 거짓말할 사람 같지 않으니까 그럼 올 때 어느 날 오겠다고 약속하고 돈 천원을 주고 우리를 데리고 어느 산골짜기, 산골짜기로 가던 게 거짓말 보태 한 70도 경사는 될 것 같아요. 그런 데로 막 발 하나만 잘못 디디면 돌이 둘둘둘둘 굴러 내리는 그런 곳으로 내려가 가지고, 거기에 도착하니까 두만강 건넌 발자국 자리가 잔뜩 있더라고요. 진탕에. 우리 동생이 나한테 와서는 두만강을 넘을 때 남녀가 둘이 붙들고서 그 물살을 이기지 못해 물에 들어갔다 나갔다 마지막에 둘이 다 헤어져서 물에 빠져 죽는 걸 직접 자기 눈으로 봤다 하면서 그래 정말 그 광경을 못 보겠더라고 그러더라고요.
두만강을 건너다 죽는 이들을 봤음에도 그 억센 물살에 몸을 실은 노경미 씨 가족은 1998년 북한을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중국에서 숨어 산 세월이 10년입니다. 탈북해 한국에 정착하기 전까지 가슴 졸이며 버텼던 시간은 지금도 잊고 싶은 괴로운 기억이지만, 두만강을 건너는데 성공한 그날의 기억만큼은 경미 씨 인생 최고의 날 중 하루였습니다.
노경미: 처음에 들어섰을 때는 그 물이 무릎까지도 안 찼는데 중간쯤에 들어서니까 어깨까지 올라오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셋이 어깨를 붙잡고 옷은 다 벗어서 목에다 걸었는데 그 옷이 다 젖었어요. 물살이 엄청 세더라고요. 후들후들 걸으면서 이 두만강을 건넜어요. 그래서 일단 건너가지고는 그 젖은 옷을 짜서 입고 그 다음에 그 산 꼭대기에 올라갔는데, 하나님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때 당시에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이 말을 내가 했어요. 너무도 성공한 것이 기쁘니까 누구한테 감사드려. 북한 같으면 ‘김일성 고맙습니다’ 했겠는데 이제는 그 나라를 뜨고 중국 땅에 들어서니까 ‘하나님 고맙습니다’ 말이 나가더라고요.
탈북하던 날의 기억,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이들도 있지만, 여전히 기억하는 것조차 괴로운 탈북민들도 있습니다.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나의 첫 탈북기,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