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현대판 노예상인을 만나다 (2)
2024.07.04
한유미: 저는 팔아달라고 그랬었죠. 아무리 어째도 북한보다야 살기가 낫겠지, 굶어 죽지는 않겠지 했죠. ‘야 내 너를 넘기려면 네 물건 있니, 뭐 어떻게 너 나한테 써비 줘야 될 게 아이야’ 이러는 거예요. 써비라는 게 그거예요. ‘너 나한테 돈을 줘야지, 내가 너를 넘겨주지’ 해서 ‘며칠만 있으면 열아홉 살인데 내 이제 어른이 됐으니까 나를 파시오’ 이렇게 된 거예요.
김정아: 저를 놓고 어떻게 돈거래 되는 건 다 알고 넘어왔지만 중국 브로커하고 연길에 들어왔을 때 중국 브로커 보고 그랬죠. 한국 보내달라고. ‘너 미쳤구나. 죽으려고 작정했구나. 너 죽으려고 왔구나’ 그러면서 아예 말이 안 통하는 한족 동네에 저를 팔아 넘긴 거죠.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예진입니다. 탈북민들은 이제껏 귀순자, 북한이탈자, 새터민, 탈북자, 북한이탈주민 등 시대마다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바뀌어 온 호칭만큼이나 국가와 사회, 사람들에게 다른 대접을 받아왔죠. 30년 전까지만 해도 간첩 취급을 받던 탈북민들, 지금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쯤 되는 국회의원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사이 탈북민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탈북부터 한국정착까지, 그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그들의 속얘기를 들어봅니다.
김은주: 저희가 목숨 걸고 탈북을 했는데 이제 돌아갈 수는 없고 밤에 아마 자정쯤 되었을 것 같아요. 계속 산만 걸을 수 없어서. 그리고 길에도 이제 다니는 사람도 차도 없다 보니까 저희가 큰 길로 내려왔어요. 뒤쪽에서 차 불빛이 이제 보이더라고요. 차 한 대가 이제 지나가는 거였고 저 옆에 다가오면서 속도를 늦추더라고요. 그리고 차문이 열리길래 뭐 도와주려고 그러나 싶은 찰나에 저희 언니를 이제 낚아채가지고 차에 실었어요. 이게 일단 언니를 실은 다음에 이제 차가 속도를 내서 달리다 보니까 저희가 잡지를 못했어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밖을 나가 보니까 엄마가 언니를 찾아왔더라고요. 굳이 묻지 않아도 이제 속옷이 이제 물들어 있었고 언니는 이제 그 차에 이제 잡혀 끌려가 가지고 몹쓸 일 당한 다음에 버려졌어요. 길가에. 근데 저희 언니가 저보다 2살이 많거든요. 근데 그 탈북 과정에서 단 두 살이 많다는 이유로 저보다 훨씬 험한 삶을 살았어요. 그 일 있은 이후로 그날 이후로 저희는 이 얘기를 한 번도, 지금까지도 엄마, 언니, 저 셋이서 이 얘기를 꺼낸 적이 없어요. 이게 그냥 저희 저 기억 저편에서 사라지길 바라기도 했고…
그 날 일어난 말도 안 되는 사건을 가장 잊고 싶은 두 살 위 언니도, 엄마와 은주 씨도 이제는 달라지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신의 아픈 기억을 더 이상 숨기거나 피하지 않고 세상에 알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김은주: 하루는 그냥 평범한 날이었어요. 근데 언니랑 기회 돼서 단 둘이서 삼겹살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거든요. 맨 정신이 언니가 삼겹살을 먹다가 갑자기 꺼이꺼이 울면서 자기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대요. 그래서 죽기 전에 자기 이야기를 다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이 세상 모두가 알아줬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던 것 같아요. 억울해서…
강정희: 아는 지인이 중국에 가서 고사리를 꺾어 팔면 한 달만 팔면 중국 돈으로 4천 원을 받는데요. 그렇게 하고 따라 나섰는데 결국 그 여자가 중국에 와서 나를 팔고 간 거죠. 저희가 도착한 안가라 하는 곳은 마을이 아니고 산속에 땅집을, 움막을 파고 만든 집이에요. 결국 땅을 파서 만든 집이다 보니까 크기가 얼마나 크겠어요. 이만큼 밖에 안 돼요. 여덟 명이 빼곡히 누워요. 한 방에. 어느 날 밤 잠깐 자다 보니 옆에 다른 남자 브로커가 있고, 눈 떠 보니 내 위에도 남자가 있어요. 그래서 너무 화가 나서 팔을 확 차서 내리쳤어요. 그랬더니 7명을 다 안 재워요. 안 재우고 밤새 때려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제발, 제발 좀 요구조건 들어줘라. 우리 좀 살려주라’ 그때부터 성폭행, 강간이 시작이 되는 거예요.
다시는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은 그 날의 일을 용기 있게 말해준 강정희 씨. 정희 씨가 정말 잊을 수 없는 건 폭행과 강간보다 더 잔혹했던 밤, 그 날 17살 어린 소녀의 얼굴이라고 합니다.
강정희: 북한에서 성관계 한 번도 하지 않은 순수한 처녀를 데리고 오면 그 브로커비의 두 배를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는 거예요. 내가 데리고 살겠다 이런 거예요. 근데 그것도 정도가 돼야지. 17살짜리, 남자 손목 한 번 못 잡아보고 온 이 애가 옷을 벗겠어요? ‘불쌍한 애를 왜 그러냐고 왜?’ 내가 중뿔나서 나서서 그러니까 남자들이 때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나하고 17살짜리를 같이… 남자 4명이 이렇게 사각으로 쳐서 이쪽에서 한 명이 이쪽으로 차고 또 이쪽에서 저쪽 차고 하면서… 축구공이죠. 인간 축구공처럼 발끝으로 한참 맞다 보니까 까무러친 거예요. 정말, 그 악몽은 정말 잊혀지지 않아요. 집도 아닌 그곳에서 1개월을 낮에는 산에 가서 고사리 캐고, 밤에는 그 온갖 치욕을 다 겪고… 마지막엔 정말 간절하니까 어떤 생각이 드냐면요. 누군가가 제발, 누가 나 제발 좀 사주세요. 그럼 내가 그 사람한테 은혜 갚겠습니다.
많은 탈북여성들이 겪는 인신매매와 중국에서의 참혹한 생활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게 떠오를 만큼 그녀들에겐 치명적인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마치 그게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숨기며 살아왔죠. 하지만 이젠 그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나 자신다운 삶을 사는 지금, 자존감을 찾은 그녀들은 이제 세상의 무대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김정아: 북한에서의 삶은 나라를 위한 삶이지 여성으로서 삶은 아니었습니다. 중국에서의 삶 역시 여성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내 앞에 닥친 상황을 이겨내는 삶이었어요. 나의 닥쳐진 삶이 나를 그 길로 내몰았고 그 길을 이겨내고 나는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살아온 삶이 부끄러운 삶이 될 수는 없습니다.
김명희: ‘탈북하면 탈북 여성들이 다 저렇더라. 이렇게 편견을 가지게 된다. 제발 북한 여성들이 나가서 이런 얘기 안 했으면 좋겠다’ 하시는 탈북 여성분들도 있더라고요. 이게 완전히 끝난 과거가 아니에요. 지금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리고 가해자는 분명히 존재하는 거잖아요. 근데 내가 왜 피해자가 숨어야 돼요? 여기서 드러내지 못하더라도 당당했으면 좋겠고, 움츠러들지 말았으면 좋겠고, ‘나는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다’라고 인지를 하고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소중한 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중국에서 깨달았다고 말하는 그녀들의 이야기,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