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북송… 태어나 처음 느낀 분노 (2)
2024.07.18
김은주: 인간에게 있는 모든 구멍을 확인한다고 보시면 돼요. 돈을 찾기 위해서…
김명희: 집결소로 넘어오니까 임신한 여성들 같은 경우는 발로 막 차서 강제 낙태시키고…
김주찬: 팬티 한 장을 어떻게든 뺏어가려고 막 달려드는데 저는 그 팬티를 안 뺏기겠다고 막 버티고 맞아가면서… 왜냐하면 저는 그냥 그 팬티 한 장 여벌이 있는 게 유일한 희망 같았어요.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예진입니다. 탈북민들은 이제껏 귀순자, 북한이탈자, 새터민, 탈북자, 북한이탈주민 등 시대마다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바뀌어 온 호칭만큼이나 국가와 사회, 사람들에게 다른 대접을 받아왔죠. 30년 전까지만 해도 간첩 취급을 받던 탈북민들, 지금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쯤 되는 국회의원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사이 탈북민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탈북부터 한국정착까지, 그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그들의 속얘기를 들어봅니다.
조현정: 그때가 1월이었어요. 추운 겨울이었어요. 그러면 아이를 데리고 간 아이 엄마는 포승줄에 묶지 말아야지, 얘를 어떻게 안고 가든 업고 가든 할 건데 저까지 이렇게 포승줄에 다 묶은 거예요. 그래서 ‘저 아이는 지금 어떻게 그럼 데리고 가냐’ 그랬더니 이 포승줄 묶은 위에다 이렇게 올려놓는 거예요. 딱 이렇게 하고 한 30분 넘게 걸었던 것 같아요. 처음으로 그 땅에 대한 분노를 느꼈던 것 같아요. 잡혀 나가면서.
탈북 후 중국에서 하루도 편히 잘 수 없을 정도로 중국 공안에 발각될까 조바심을 내며 살던 탈북민들은 북송 이후의 감옥살이가 그토록 잔혹할 줄은 몰랐다고 말합니다. 아이를 데리고 중국으로 돈을 벌러 갔던 조현정 씨는 한국행을 택했다가 미얀마에서 붙잡혀 북송됐는데요. 북송과 동시에 다음 탈북을 다짐할 정도로 북한에 대한 미련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중국 공안에 잡혀 온성보위부로 북송된 명희 씨는 보위부로 끌려가던 첫 날부터 시작된 인권유린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는데요.
김명희: 잡아서 북한으로 딱 보내게 되면 그러니까 저 같은 경우는 온성보위부로 넘어갔어요. 온성보위부로 넘어갔는데 거기 가는 순간부터 이렇게 일체 몸에 실오라기 하나도 안 걸치게 하고 한 3명씩 이렇게 들어가서 그 안전원이 보는 앞에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키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뭐 이런 거 왜 시키는지 몰랐어요.
김은주: 인간에게 있는 모든 구멍을 확인한다고 보시면 돼요. 돈을 찾기 위해서…
김명희: 거기서 끝나는 줄 알았어요. 보위부니까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집결소로 넘어오니까 집결소 딱 들어오면서 마당에다가 다 앉혀놓고 앞에서 또 한 명, 한 명, 사람이 어디 갔다가 오는 거예요. 손에다가 비닐 장갑 같은 거 끼고 있잖아요. 막 자궁 검사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막 다 이렇게 몸을 90도로 숙이는 자세를 취하게 하고 막 손까지 넣어서 검사를 하더라고요.
진짜 굉장히 충격을 받았는데…
이경화: 복도에서는 거의 무릎 꿇고 있어야 되고요. 그리고 방에 들어가면 그 되게 작은 공간에 이제 사람들이 있는데 거기서 이제 양반다리, 뒤에 있는 사람의 배를 베고 그 가랑이 사이에 제 몸을 상반신을 눕힌 상태로 누워서 자야 되는데 그래서 소리를 내면 이제 그날은 다시 앉아서 자야 되는…
김명희: 감옥에 있으면서 첫 번째 북송이 아닌 분들을 만나게 되잖아요. 두 번째, 세 번째 그런 분들을 만나면서 첫 번째 그때 어땠다 라는 얘기들을 굉장히 많이 들었거든요. 임신한 여성들 같은 경우는 발로 막 차서 강제 낙태시키고…
김은주: 더러운 년이라고 하고, 중국 남자와… 떼놈이랑 어떻게 했다 그러고 북한에서 들었던 게 뭐 거지도 아니에요. 그냥 쓰레기. 너넨 인간 쓰레기다. 아 내 고향이지만 정말 내가 살 곳은 아니구나. 우리가 살 곳은 아니구나.
인간 쓰레기 취급을 받을수록 고향 땅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던 건 현재 탈북민들의 자립을 돕는 위로재단 대표 김주찬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주찬: 맞다. 여긴 지옥이었지… 제가 북송당할 때 라오스에서 북송됐는데 라오스가 덥잖아요. 남방 지역이라. 북송돼서 북한을 갔더니 북한이 한겨울인 거예요.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에 샌들 하나 신고 나갔어요. 그리고 팬티 한 장이 딱 여벌이 있었어요. 갔는데 거기에 이미 먼저 생활하고 계신 분들이 팬티 한 장을 어떻게든 뺏어가려고 막 달려드는데 저는 그 팬티를 안 뺏기겠다고 막 버티고 맞아가면서 ‘이 새끼는 왜 이렇게 팬티 한 장에 집착하는 거야’ 이러면서… 왜냐하면 저는 그냥 그 팬티 한 장 여벌이 있는 게 유일한 희망 같았어요. 그냥 그거라도 안 뺏겨야겠다 했거든요. 그게 약간 의지를 이렇게 드러내는 부분이었나 봐요. 그 팬티 안 뺏기려고 엄청나게 고생을 했어요. 작업장에 끌고 가서 노동을 많이 시키더라고요. 그 팬티 한 장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죠. 반년이 지나서 고향 감옥으로 이송이 되고 가서 이제 고향에 있는 안전부 감옥에서 다시 재판을 받아야 되는 상황이었어요. 저만 안전원들이 막 괴롭혔었어요. 왜냐하면 중국에서 오래 살아가지고 이상한 바이러스와 벌레들을 가지고 왔다 이러면서 저를 굉장히 벌레 취급하는 거예요. 한겨울에 저를 옷을 발가벗겨 놓고 호스로 물을 막 뿌리려고 옷을 벗으라는 거예요. 팬티 한 장 지키려고 얼마나 고통당했는데 벗으라고 그러니까 진짜 죽을 것 같았어요. 벗었는데 몸에서 벌레가 나오는 거야. 전부 다 그 땀구멍 안에 들어가 있다가 확 제끼니까 아주 오랫동안 거기서 틀고 터를 잡고 살던 애들이 놀라가지고 확 나온 거였어요. 그러니까 이 안전원들이 그걸 보고 깜짝 놀라는 거예요.
감옥에서 속옷 하나가 가진 전부였던 주찬 씨는 그것마저 빼앗기면 자신의 미래마저 모두 잃을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그 속옷 한 장을 지키려다 강제노동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김주찬: 한 3일 만에 픽 그냥 쓰러졌는데 가마니에 둘둘 싸가지고 이렇게 휙 버렸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데 정신도 오락가락한 거죠. 그러니까 1시간째 거기 누워가지고 한겨울에 버둥버둥하고 있었던 거였어요. ‘야 자유구나 이제 나는 이제 재판을 안 받아도 되고 난 이제 자유다 살았다’ 이게 엄청난 안도감이 막 오는 거예요.
김은주: 고향을 나온 지 4년째였거든요. 그런데 북한에서는 그때 아사자가 하도 많다 보니까 3년 무소식이면 사망자 처리를 해버렸어요. 그리고 저희는 바로 두만강으로 갔고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다른 선택, 고민 없었어요.
조현정: 그러니까 몇 번을 잡히더라도 사람들이 다시 넘어오는 이유가 그렇게 잡히면서 겪는 그런 반인륜적인, 그런 감당해내기 어려운 상황들을 겪으면서 그 나라에 대한 환멸을 이제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 땅에 대한 미련이 그때는 이제 없어지는 거죠. 그 당시의 상황이 너무 힘들다 보니까.
북송 후 감옥에서 인간 쓰레기 취급을 받으면서도 이들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다시 탈북해 자유를 찾겠다는 의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한국행, 한국 땅을 밟기 전까지 이들에게 더 이상의 시련은 없는 걸까요?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편집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