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북한에서 들고 온 단 하나의 물건 (1)
2024.09.05
PD: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한옥정: 행복했던 순간을 여쭤보는데 눈물이 날까요? 행복했던 순간은 아빠랑 엄마랑 언니랑 동생이랑 같이 누워서 아빠의 말 듣던 때?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요. 행복이라는 게 저는 목숨 걸어야만 얻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행복이란 말만 들으면 그냥 코끝이 찡한 거 같아요.
PD: 가족에게 한마디 하세요.
한옥정: 나랑 가족이 돼 줘서 고마워.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예진입니다. 탈북민들은 이제껏 귀순자, 북한이탈자, 새터민, 탈북자, 북한이탈주민 등 시대마다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바뀌어 온 호칭만큼이나 국가와 사회, 사람들에게 다른 대접을 받아왔죠. 30년 전까지만 해도 간첩 취급을 받던 탈북민들, 지금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쯤 되는 국회의원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사이 탈북민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탈북부터 한국정착까지, 그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그들의 속얘기를 들어봅니다.
박송미: 저한테 가족은… 가족이 있어야 저의 삶이 완벽하게 완성되는 것. 엄마 만나기 전에는 만나면 되게 뭘 많이 말할 것 같았거든요. 할 말이 많았거든요. 이게 너무 반가우니까 말이 안 나오는 거 있잖아요. 한 3일 정도 막 실감이 안 나는 상태에서 생활을 하다가 딱 일어났는데 엄마가 고향 음식처럼 흰밥에, 감자 반찬에, 된장국에 막 콩반찬에 이렇게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더 맛있는 거예요. 진짜 처음으로 누군가가 해주는 밥이었거든요. ‘엄마,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그때 이제 막 통곡하고 엄마한테 하고 싶었던 이야기 계속 줄줄이 늘어놓고…
먼저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어머니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병든 할머니를 간호하다가 뒤늦게 탈북한 박송미 씨는 한국에서 10여 년 만에 만난 어머니 앞에서 처음엔 눈물도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해주시던 밥과 반찬 그 맛에, 오랜 그리움이 담긴 편지 한 통에 그간 쌓였던 응어리가 터지고 맙니다.
박송미: 엄마가 또박또박 써주신 편지… “사랑하는 내 딸 성미야. 생일 축하해. 몇 년 동안 곰 인형을 놓고 너의 생일을 보냈을 때가 엊그제였는데 오늘은 너의 생일상을 엄마가 차려줄 수 있어서 꿈만 같고 기쁘구나. 한국에 와서 힘들고 괴로울 때도 많았겠지만 네 곁에는 항상 엄마 아빠 그리고 예쁜 동생이랑 가족이 있단다. 우리 가족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자. 우리 딸 생일 축하해” 너무 소중한 겁니다.
한유미: 저를 결정적으로 한국으로 가라. 남조선으로 가라 한 게 저희 어머니였어요. 저희 엄마가… 왜 나만 왜 나만 자꾸 울어… 저희 엄마가 제가 올 때 헤어질 때 42살이었거든요. 근데 이제 내가 그 나이가 돼가는 거예요. 근데 우리 어머니는 마흔두 살 때 할머니 같았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은 너무 고생을 해가지고 그게 좀 마음이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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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형제를 고향에 두고 온 탈북자들은 10년, 20년 세월이 아무리 많이 지나도 그리움과 죄책감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통일되면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세월 속에 점점 더 희미해져 갑니다. 오직 죽음을 넘나드는 탈북 과정 속에서도 품에 꼭 안고 온 사진 한 장만이 잠시 위안이 됩니다.
장세율: 2009년도에 결국 저희 형제들이 북한 보위부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요. 아직까지 생사는 모릅니다. 이것이 제 아버님과 제 남동생 그리고 저거든요. 저희 부친이 직업군인입니다. 제가 이제 군복무를 할 때 저희 아버님이 평양에 오셔가지고 아들들을 만나가지고 이제 사진을 찍은 겁니다. 이거는 이제 제 어머니가 딸들 데리고 매형이랑 같이 찍은 사진입니다. 엄마는 그래요. 내가 이제 몇 번 오라고 권유도 했었고, 사람들도 보냈었고 그렇게 했는데 ‘언젠가는 이제 우리 형제들이 살아서 나온다면 몸 둘 곳은 있어야 되지 않겠냐. 그래도 엄마를 찾아오지 않겠냐. 내가 이제 죽어서도 자식들 기다렸다 하는…’ 어머니가 마음의 빚을 지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여기 있으련다. 그리고 엄마 데리고 가려면 죽은 다음에 유골함으로 해서 가져가라’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죠.
한용수: 우리가 왜 흔히 그런 표현을 하잖아요. 뭐 남 눈에 눈물 흘리게 하면 네 눈에는 피눈물 흘릴 거라고. 제가 남한에 오고 나서 아버지랑 어머니는 추방을 당했고요. 우리 형도 일종의 전방부대에 있었는데 그냥 강제로 제대를 시켜버렸거든요. 그런데 저는 남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게 아니고 내 부모 형제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거잖아요. 그래서 기도를 하면 가끔씩 그런 기도를 해요. ‘나 천국 안 가도 돼요. 내가 천국 안 가도 되는데 나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 사람들은 어떻게 천국을 좀 보내주면 안 되겠어요?’ 이런 기도를 하는 것 같아요. 항상 그 미안한 마음 죽을 때까지 내가 짊어지고 가야 되는 업보가 아닐까… 그런 생각합니다.
용수 씨의 기도, 하늘에서 들어줄까요? 살기 어려워 탈북하게 만든 북한에서도, 맨땅에서 내 힘으로 새로 시작해야만 하는 한국에서도 나를 살게 하는 건 결국 가족이라고 말하는 탈북자들의 이야기,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