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김명진 씨(1)

서울-김인선 xallsl@rfa.org
2020.01.16
nk_ppl_crossing-620.jpg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역인 압록강변에서 북한 군인과 주민들이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오늘은 제가 먼저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할 것 같은데요? 평소보다 피곤해 보이는데 혹시 무슨 일 있어요?

김인선: 티 안 내려고 했는데…표정에서 나타나나요?

마순희: 연륜으로 느껴지는 감이라고나 할까요? 암튼 여느 날과 달라 보이기는 하거든요. 혹시 걱정거리라도 있는 건 아닌가 해서요.

김인선: 요즘 방학기간이잖아요. 딸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부딪치는 일도 많아지네요. 잘되라고 하는 말인데 제가 하는 말은 다 잔소리처럼 들리나 봐요.

마순희: 저 역시 세 딸을 키운 엄마로 마음에 와 닿는 말이네요. 인생 선배로 또 선배 엄마로 한마디 하자면, 너무 걱정 마세요! 저도 그렇고 그런 근심, 걱정 안 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저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세 딸들과 적지 않은 갈등을 겪기도 했었는데요. 훈계의 말이든 꿈꾸게 하는 말이든 부모의 사랑의 말이 때때로 자식들에게는 미움의 말로 전달되더라고요. 그래서 좋은 부모가 되기가 정말 어렵다고들 하는 것 같습니다. 분명한 건 진심은 통한다는 거,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자녀들이 느끼게 된다는 점인데요. 아쉽게도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는 시기는 다 다르고 또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김인선: 듣고 보니 다 맞는 말씀이네요. 저도 어린 시절에 잘되라고 하는 부모님의 말이 다 잔소리처럼 여겨진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희 엄마가 '나중에 결혼해서 딱 너 같은 딸 낳아봐라!‘ 하셨는데 그 말이 현실이 된 것 같아요.

마순희: 공감합니다. 내 자식이 좀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은 부모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감정일 텐데요. 오늘 성공시대 주인공이 대표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자식의 미래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탈북을 했다는 제주도에 살고 있는 김명진 씨에 대해 소개해 드릴게요. 명진 씨는 북한의 함경남도의 한 지방에서 원림사업소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사업소에서 일하는 날보다 8.3 자금이라고 돈을 내고 따로 자기 일을 하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제가 있을 때에도 8.3제품, 8.3가내반, 8.3매대 등 8.3이라는 말이 많았는데요. 간단히 말하면 국가에서 자재를 받지 않고 놀고 있는 유휴자재를 동원해서 제품도 만들고 판매도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명진 씨의 말에 따르면 자재도 공급 못하고 기업소들이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다 보니 그 이후에는 8.3자금이라고 직장에 월 얼마씩 돈을 내면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참 세상 많이도 변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명진 씨에게 탈북은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처갓집 식구들이 모두 탈북해 한국에 먼저 갔어도 외아들인 자신은 부모님을 두고 떠날 수 없기에 따라 나설 생각조차 못 했다고, 아니 안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살고 있는 처가 쪽 형제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부쩍 늘어난 거죠. 딸이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으니까요. 명진 씨는 결국 부모님께 한국에 먼저 가서 자리 잡고 모셔가겠다고 약속한 뒤 탈북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2011년 6월에 부모님을 두고 떠나는 발길이 무겁기는 했지만 네 살 어린 딸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고 그 해 말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김인선: 4살 된 어린 딸을 데리고 압록강을 넘는 일이 얼마나 위험했을까요. 그 위험을 무릅쓰고 탈북을 한 것이 딸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어떤 의미죠?

마순희: 네. 명진 씨의 아내가 이런 말을 들려주더라고요. 한국에 먼저 간 형제들과 자주 통화를 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현실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는데 특히 썩고 병든 사회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었던 남조선 사회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됐다는 것입니다. 어린 딸이 커 갈수록 아이에게 한국에 대해 어떻게 교육을 시켜야 할지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고 하면서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성공시대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탈북민들의 탈북 계기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데요. 90년대에는 고난의 행군으로 살기 힘들어서 탈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지금은 탈북 이유가 많이 다양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먼저 탈북한 가족들과 만나 함께 살고 싶어서 한국으로 오는 경우도 많지만 지금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유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거든요. 제가 만나 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또 우리 자유아시아방송(RFA)이나 KBS와 같은 라디오 방송을 듣고 한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탈북했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거든요. 광명시에서 시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한 여성은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국경지대에 왔다가 한국드라마를 보게 됐는데, 여자주인공처럼 자신도 그렇게 한 번 멋지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탈북했다 하더라고요. 명진 씨처럼 자녀의 미래를 위해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해 탈북했다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금은 남한으로 유학간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탈북 이유나 계기가 다양한 것이 현실이니까요.

김인선: 딸을 위한 결정이었지만 그 결심을 하기까지 걸림돌이라고 해야 할까요? 명진 씨가 많이 망설였다던데...

마순희: 맞습니다. 명진 씨는 외아들이라고 합니다. 남한보다도 더 세습적인 면이 강한 북한에서는 아들이 부모를 모시는 것은 거의 정해진 이치로 알려지고 있고 더구나 외아들은 군대에도 내보내지 않을 정도로 부양의무를 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요. 효자였던 명진 씨는 부모님 때문에 탈북을 망설였던 겁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먼저 한국에 간 다음에 부모님을 모셔가기로 약속하고 고향을 떠났던 건데 한국까지 오는 그 과정이 위험하고도 쉽지 않은 간고한 노정이라는 걸 몸소 경험해 봤기에 고령의 부모님이 탈북과정을 견디지 못하실 것 같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명진 씨는 지금도 한국으로 오시라는 말을 못하고 생활비를 보내드리고 있다고 하는데요. 많은 분들이 남한에 먼저 정착한 가족들이 있고 그들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탈북을 망설이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 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누구나 위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고령이신 분들은 그 어려운 탈북경로를 이겨내지 못 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을 것 같고요. 젊은이들의 경우 용단을 못 내리는 이유는 아마도 다 제각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탈북을 하려면 경제적 비용도 만만치 않은데 북한에서 생각하기에는 천문학적인 숫자일 테니 그 위험한 일을 시도하기보다 좀 고생스럽긴 하더라도 그냥 현상유지를 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도 할 것 같기도 합니다. 가끔 한국에 간 식구들이 보내주는 돈이 조금은 도움이 되기도 하겠죠.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한국에서 돈을 보내도 거의 절반 정도밖에 식구들에게 전달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천 달러를 보내도 500달러 정도만 전해져서인지 힘들게 모은 돈을 보내도 별로 큰 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될 때도 있더라고요. 그럴 땐 정말 허무하다는 생각도 들던데요. 반대로 한국에서 보내주는 돈을 접해보고 생각보다 큰 액수에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탈북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김인선: 탈북과정은 여전히 쉽지 않지만 한국에 대한 정보는 과거에 비해 많이 접하고 오시는 것 같아요. 명진 씨는 어땠나요?

마순희: 명진 씨 경우에는 물론 북한에 있을 때에는 남한에 먼저 간 식구들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고 한국에 올 때에도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명진 씨는 하나원에서 주택 배정을 받을 때에 거주지를 처가 식구들이 살고 있는 제주도로 신청했고 제주도에서 살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명진 씨가 결심한 것이 있다는데요. 한국에 올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도움을 받았지만 정착할 때에는 처가의 도움을 받지않고 꼭 제 힘으로 자리를 잡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쉽지않은 선택이었고 또 실천한다는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명진 씨는 그 결심을 실천에 옮겼고 그런 결심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자신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처가의 도움을 받았더라면 좀 더 빨리 정착할 수 있었는데, 명진 씨는 왜 빠른 지름길을 앞에 두고 험한 길을 택했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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