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여전히 코로나비루스의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어요. 마스크 착용은 기본이자 필수가 됐고 개학 연기, 재택근무, 자발적인 자가 격리까지, 더 이상의 확산을 막기 위해 모두들 한 마음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모임이나 행사는 물론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는 대부분 취소되거나 연기되고 있는데요. 혼자 지내시는 분들은 외부 모임을 못하게 되면서 심리적인 불안감도 느낀다고 하더라고요. 가족 없이 홀로 계시는 탈북민들도 걱정이네요.
마순희: 맞습니다. 저도 요즘은 사람들을 될수록 적게 만나고 걷기 운동을 해도 사람들이 비교적 적은 저녁시간대에 하기도 하면서 ‘사회적 거리 두기’에 동참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지금 저희도 이렇게 전화로 방송을 하게 됐네요. 우리 탈북민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웬만한 모임은 자제하고 개인위생을 더 철저히 지키면서 스스로를 방역한다고 해야 할까요? 한 사람이라도 걸리는 날에는 전체가 격리되니 모두 같은 마음으로 함께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외롭게 홀로 지내는 탈북민도 많기 때문에 전화통화를 통해 늘 안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힘을 주고 있습니다.
김인선: 정말 잘하고 계시네요. 코로나비루스가 전염이 강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지금처럼 만남을 최소화하고 조심해야 할 것 같은데요. 힘들겠지만 지금의 이 상황을 무사히 잘 견뎌낼 수 있도록 모두들 힘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공시대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 나눠볼까요? 오늘의 주인공도 지금의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전염병에 얽힌 사연이 있다고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한국에 온지 9년차 된 50대 초반의 이미선 씨입니다. 미선 씨는 20대 후반인 1990년대 중반, 북한에 만연했던 전염병에 걸렸다가 어렵게 완치가 됐다고 하는데요. 1990년대 중 후반에 북한에서는 콜레라와 파라티푸스라는 전염병이 창궐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특별한 주사약이나 백신은 고사하고 그 흔한 링게르를 몇 통만 맞아도 살 수 있었는데 그것도 못 구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던 그때는 정말,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입니다. 미선 씨는 그 두 가지 병에 다 걸렸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았는데요. 한 병실에 있던 환자가 사망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재발할 수도 있다는 말이 더 무섭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미선 씨는 치료약이라도 구한다고 1998년 29세 때에 중국으로 들어갔고 그 일이 탈북의 계기가 됐습니다.
김인선: 신분문제도 있고, 미선 씨가 중국에 가서 약을 구할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중국으로 가는 길에 인신매매도 많이 당하잖아요.
마순희: 불법체류자라 병원에 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프면 약국에 가서 약을 사 먹으면서 버틸 수 있었고 다행히 미선 씨는 인신매매를 당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중국에 도착한 미선 씨는 피복업체에서 옷 만드는 미싱사로 취업을 했다는데요. 총각이었던 피복업체 사장과 마음이 통하게 되었고 3년 후에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피복회사를 함께 운영해 나갔고 둘 사이에는 예쁜 딸도 태어났습니다. 중국에서의 삶도 나쁘지는 않았는데 당시 중국에선 한국바람이 불었답니다. 웬만하면 다들 한국에 가서 돈을 번다고 할 때라 미선 씨는 자신이 먼저 한국에 가서 국제결혼 수속을 통해 함께 한국에서 사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남편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그렇게 미선 씨는 남편에게 딸을 맡기고 2012년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그동안 고질적으로 앓았던 병도 탈북민들의 의료를 지원해주는 국립의료원에서 치료를 받고 완치됐고 지금은 ‘함께하는 재단‘이라는 사회적 기업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한국에 와서 건강을 되찾았다고 하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미선 씨가 중국에서 지낸 시간이 13년이에요. 그 정도면 현지인 수준으로 대화도 가능할 것 같고 생활하는 면에서 불편함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왜 미선 씨는 다시 낯선 곳에서의 삶을 택했을까요?
마순희: 또 다른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선 씨의 아버지는 국군포로였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더랍니다. 중국에 먼 친척이 있었기에 그곳에 찾아가지 않았을까 추측만 했다는데요. 약을 구하러 두만강을 건널 때 ‘중국에 가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한 가닥의 희망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는 없었는데요. 친척집에서 알아보았는데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아마도 한국에 간 것 같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미선 씨는 아버지를 한국에 가면 만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게 됐습니다. 그래서 가정도 이루고 생활이 안정된 미선 씨가 한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한국에 가서 돈도 벌고 아버지 소식도 알 겸 결심한 한국행이었는데 미선 씨가 한국에 왔을 때에 이미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떠나신 뒤였다고 합니다. 좀 더 일찍 왔으면 하는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그렇게라도 제대로 된 아버지의 소식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미선 씨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하루 빨리 딸아이와 남편을 데려오기 위해 재봉 작업하는 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사실 북한에서는 양복사, 재봉사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북한에서 양복사라하면 제일 안정되고 수입이 많은 인기 직업이거든요.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은 힘들면서도 급여는 최저 수준이라고 해요. 그래서 미선 씨는 그 일을 그만두고 탈북민이 지역에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하나센터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하나센터에서는 미선 씨에게 취업성공패키지를 추천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취업성공패키지’라는 것은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취업상담, 직업훈련, 취업알선 등을 단계별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종합 취업지원서비스를 말하잖아요. 각 지역마다 이런 일을 담당하는 기관이 있기 때문에 직접 가서 신청하면 여러 지원을 받을 수 있고요.
마순희: 맞습니다. 개인별 맞춤식으로 해주는 데다가 취업한 후에는 취업성공 수당까지 주는데요. 여성 가장이나 외국인 자녀, 그리고 우리 탈북민들이 취업성공패키지 지원 대상자에 해당됩니다. 관할고용지원센터에서 신청 가능한데요. 저희들은 영등포구청역에 있는 서울남부고용센터에서 신청할 수 있습니다. 하나센터의 취업상담사는 탈북민들이 취업성공패키지에 신청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특히 면접할 때에는 동행면접도 함께 가주어서 취업에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취업성공패키지의 교육일정은 각 자격증마다 서로 다 다른데요. 처음 미선 씨가 일을 그만두고 고용지원센터에 갔을 때에는 요양보호사 자격증 교육이 시작되는 시기였습니다.
다양한 취업성공패키지 교육 중에 자신이 원하던 회계사 공부를 하려면 몇 달은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 미선 씨는 우선 요양보호사 자격증부터 땄다고 합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공부만 하겠다고 몇 달을 쉬는 것보다 다른 공부라도 해두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거죠. 미선 씨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요양보호사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공부만이 아니라 한국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도 새로 알게 되고 사회 현실에 대한 공부도 함께 하게 되는 거라 너무 좋았다고 합니다. 당장의 돈을 생각하면 요양보호사 자격증으로 시설에 취업을 할 수 있었겠지만 미선 씨는 원래의 계획대로 회계사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제대로 된 회사에 취업하려면 회계사 자격증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김인선: 미선 씨는 취업성공패키지를 알짜배기로 제일 잘 활용하신 분이네요. 그럼 취업성공패키지를 통해 자격증을 두 개 땄으면 성공수당으로 주는 장려금도 두 배 받는 건가요?
마순희: 아니에요. 탈북민들이 자격증을 취득하면 장려금을 주는 것은 맞지만 그 장려금은 자격증 한 가지에만 유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미선 씨는 장려금보다 더 좋은 취업에 성공을 하게 됩니다.
김인선: 탈북하면서 고생이 심했다는 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미선 씨의 삶은 비교적 순탄하게 느껴집니다. 이 느낌이 계속 유지됐으면 좋겠네요. 미선 씨의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볼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