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열정, 신원농장 이향란 씨(1)

서울-김인선 xallsl@rfa.org
2019-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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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전북 고창군 공음면 학원농장 청보리밭.
사진은 전북 고창군 공음면 학원농장 청보리밭.
사진-연합뉴스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저는 점점 매주 이 시간이 기다려져요. 왜냐하면 매회 주인공을 통해 얻는 교훈이 많거든요. 마 선생님께서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 나도 그렇게 해봐야지...하면서 누구보다도 열정으로 시작하려고 마음을 먹는데요. 생각처럼 쉽지는 않더라고요.

마순희: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오늘의 주인공을 통해 간절함과 진정성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열정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오늘의 주인공은 2011년에 한국 땅을 밟은 이향란 씨입니다. 향란 씨는 한국에 먼저 나와 있던 남동생이 경상남도에 살고 있었기에 같은 경상남도에 정착하게 되었답니다. 지금은 남한에서 만난 남편과 함께 신원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향란 씨를 만나기 위해 제가 직접 집으로 찾아갔는데요. 몇 십 호가 모여서 살고 있는 동네였는데 마을 앞에 펼쳐진 3만여 평의 드넓은 논밭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거든요. 그런데 그 논이 거의 향란 씨네 농장 논이었습니다. 배추며 무를 심은 밭도 있고 깨, 마늘 농사도 짓고 있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농사를 짓다 보니 향란 씨 부부는 항상 논에서, 밭에서, 그리고 미곡처리장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일뿐만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향란 씨의 삶 자체가 열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거든요. 향란 씨는 한국에 와서 한 번도 쉬어본 적 없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처음 한국에 와서는 2년간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통행료 받는 일을 했고 그 이후에는 식당에서, 또 요양원에서, 하다못해 노상에서 뻥튀기 장사를 하며 손에서 일을 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일하면서도 같은 고장에 정착한 탈북민들과 함께 서로 도와가면서 북한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안보강사로도, 또 북한문화를 알리는 금강산예술단 단장으로서 봉사활동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도대체 몇 가지 일을 하는 거죠. 아니 그보다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마순희: 탈북민들 누구나 다 그럴 테지만 여유가 생기고 생활이 풍요해질수록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탈북민들이나 지역의 어르신들을 돕고 싶다는 사명감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사실 향란 씨는 북한에 있을 때 군사복무를 하면서 총참모부에서 청년사업을 맡아서 할 정도로 전도유망한 인재였습니다. 제대 후에도 좋은 집안의 사람과 결혼도 하고 기관에서도 927상무라고, 방랑자 꽃제비들을 관리하는 업무가 있거든요. 그 업무를 맡아서 별 어려움 없이 살았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향란 씨의 삶은 북한에서도 열정적이었고 헌신과 봉사로 이어진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인선: 북한에서도 어려움 없이 살았던 것 같은데 무슨 사연으로 탈북을 했을까요?

마순희: 네. 한때는 ‘충성심’을 발휘해서 부모 없는 아이를 34명이나 데려다 보살피기도 했고 그 공로로 큰 중앙대회에도 여러 번 참가하는 행운도 누리기도 했던 향란 씨에게도 뜻하지 않게 불행이 갑자기 닥쳤습니다. 부모님과 떨어져서 국경지대에서 살고 있던 남동생이 중국으로 탈북을 했던 것인데요. 당시 북한사회에서 탈북은 곧 반역이라는 오명으로 이어지기에 이혼을 당하게 됐고 남편과 자식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던 향란 씨도 어려운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날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 즉 그들과 영영 이별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기에 그들 앞에서 영원히 사라진다는 마음으로 탈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너무 가슴 아픈 이유로 탈북을 하셨네요. 그래도 많은 탈북민들이 남한생활을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는 거라고 하는데요. 향란 씨는 또 다른 의미로 새 인생을 시작했겠네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향란 씨는 북한에서 군사복무를 할 때에도, 927상무로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할 때에도 항상 타인의 인정을 받은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한에 정착하면서도 당연히 남들보다 잘 정착한다는 평가를 받고 싶었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 하게 된 것입니다. 향란 씨에게 있어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 들 중의 하나가 아직 지역사회의 탈북민들에 대한 안 좋은 인식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향란 씨는 자기 자신이 열심히 정착하고 있는 산 모범이 되어 그러한 안 좋은 인식들을 다 바꾸어 놓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면서도 짬 시간을 이용해서 봉사활동도 하고 안보강의도 하면서 지역사회에서 탈북민들에 대한 좋은 인식을 심어 나갔던 것입니다. 일한 급여의 대부분도 봉사활동으로 시작한 예술단의 소품과 무대복도 구입하고 차량을 대여하는 등 예술단 자금으로 썼다고 합니다.

김인선: 힘들게 번 돈 모두를 고스란히 봉사활동 비용으로 지출한 거예요?

마순희: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봉사를 많이 할수록 비용은 더 많이 필요했는데요. 그래서 고민한 끝에 고속도로 옆에서 간식도 팔았었고 땡볕 아래서 하루 종일 힘들게 번 돈 역시 고스란히 봉사활동 비용이 됐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한편으로는 열심히 공부도 했고 여러 개의 자격증도 취득했다는데요. 복지관련 자격증은 물론이고 운전면허와 장례지도사 자격을 취득해 관련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탈북민이 한국에 와서 많이 놀라는 것 중의 하나가 장례문화인데요. 저도 장례식장이라는 곳을 한국에 온지 4년 만에 처음 갔을 때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국립의료원에서 상담사로 근무했는데요. 진료를 받던 탈북민이 병으로 돌아가시면서 연락이 온 겁니다. 마땅한 상주가 없는 그분을 위해 주변 탈북민들을 모았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네요. 병원에 있는 장례식장을 갔을 때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말이 뭔지 처음 느꼈는데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장례지도사가 다 도와주고 알려줘서 의지가 됐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운영되는 형태에서부터 멀리는 장례에 구비되는 문서, 재산상속, 염습, 출상에 이르기까지 갑작스러운 가족의 죽음에 당황해 하는 유족들을 대신해서 절차를 진행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더군요. 장례지도사가 되려면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춰야 하는데요. 이론 150시간, 실기 100시간, 실습 50시간을 모두 마쳐야 수료를 인정받습니다. 총 300시간의 교육을 이수하고 매 과목마다 60점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 보건복지부에서 자격증을 발급해주는데요. 이향란 씨는 장례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취업을 한 겁니다. 지금은 그 일을 하지 않지만 주말이면 가끔 장례지도사로 일하기도 한다는데요. 여기서 번 돈 역시 봉사활동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향란 씨의 이런 노력으로 탈북민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인식도 크게 달라졌다고 합니다.

김인선: 보통 봉사자들을 보면 한 가지 일을 하면서 나머지 시간에 봉사를 하잖아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봉사하는 사람도 대단하다고 말하는데요. 이향란 씨는 상상을 초월하네요. 오로지 탈북민에 대한 인식개선을 위해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하다뇨.

마순희: 네, 우리 탈북민들은 늘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누구든 내가 선 이 자리에서 나는 탈북민을 대표한다는 마음, 두고 온 고향과 식구들 앞에 떳떳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노력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향란 씨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향란 씨는 이런 말을 하더군요. 누구든 돈만 따라가지 말고 양심껏 성실하게 살라고 조언하고 싶다고요. 그렇게 살다 보면 남한사회에서 탈북민들에 대한 인식도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우리 탈북민들을 먼저 온 통일이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그에 걸맞게 생활을 잘 해 나가야만 통일에 대한 관심과 노력들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인선: 남한 남편을 만나 농장일을 한다는 이향란 씨인데요. 워낙 하는 일들이 많고 대부분이 다 봉사활동이다 보니까 향란 씨가 가정생활을 제대로 유지할 수는 있는지.. 왜 이렇게 걱정이 될까요? 열정 가득한 향란 씨이기에 그녀의 방식대로 잘 하겠죠? 궁금한 이야기가 아직 많지만 다음 시간을 기약하면서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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