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탈북민 어르신 취업기(2)

서울-김인선 kimi@rfa.org
2023.03.23
[마순희의 성공시대] 탈북민 어르신 취업기(2) 지난 2012년 서울 양천구청에서 열린 '제1회 노인일자리 박람회'에서 노인일자리 참여자가 구직 상담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하성희 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게요. 성희 씨는 70이 넘은 나이에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고 부지런히 살아가는 분이셨죠?

 

마순희: . 성희 씨는 한국에 도착할 때 나이가 이미 60을 훨씬 넘어섰고 지금은 70대 후반입니다. 2009년부터 한국생활을 시작했는데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탈북민 지원정책으로 젊은 사람들에겐 취업장려금이 있다면 나이 든 사람들에겐 노령지원금이 있는데 60세 이상부터 받을 수 있어요. 성희 씨는 입국 당시 64살로 노령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고 당장 돈을 벌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중국과 북한에 남아있는 자녀들 생각으로 남들처럼 편하게 쉴 수가 없었고 성희 씨는 아파트 청소 일을 시작했습니다.

 

탈북민 차별에도 꿋꿋이 버틴 이유

 

북한에 있을 때 전문대학의 경리과에서 근무했던 성희 씨에게는 청소 같은 육체노동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감정적인 고충도 컸는데요. 한국 사람도 일자리를 못 찾아서 힘들어하는데 왜 탈북민을 쓰는지 모르겠다는 말들로 무시당하는 것만 같았다고 합니다. 성희 씨 스스로 그만 두기를 바랬는지 성희 씨에게 차례진 곳은 아파트 중에서도 다른 미화원들이 기피하는 제일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다른 미화원들도 똑같이 아파트 주민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계단 청소와 아파트 주변을 청소하지만 성희 씨가 맡은 아파트단지는 유독 냄새가 심하고 지저분했습니다.

 

몸이나 정신이 불편한 장애인 분이 사는데 종종 복도에 용변을 봤다고 해요. 하지만 감옥에서 고생하는 자녀들을 생각하며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성희 씨는 밀대로 대충 청소를 끝내지 않고 무릎을 꿇고 손 걸레질을 했습니다. 쪼그려 앉아서 손걸레질을 하느라 무릎이 아팠지만 제 집처럼 앉은걸음으로 이동하면서 청소했습니다. 지저분하고 냄새 나던 아파트는 성희 씨의 노력으로 깨끗하게 되었고 새 아파트처럼 관리가 됐습니다. 탈북민이라고 대놓고 무시하고 거부하던 동료들의 태도는 물론이고 입주민들과 주변의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김인선: 무슨 일이든 고충이 있겠지만 그 힘든 걸 돈이 해내게 한다는 말이 있어요. 급여통장에 찍힐 숫자, 로임을 생각하면 없던 힘도 생긴다고 말할 정도인데요. 어쩌면 성희 씨도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북송된 자녀들을 살리기 위해 한국행 선택

 

마순희: 맞는 말씀입니다. 성희 씨에게는 돈을 벌어야 할 더 절박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성희 씨에게는 네 명의 자녀가 있는데 현재 한 명만 북한에 남아있습니다. 성희 씨네는 두만강만 건너면 중국인 국경도시에서 살았는데요. 탈북 당시 중국에 친척까지 있어서 세 명의 자녀를 차례대로 중국에 데려올 수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평양으로 시집 간 맏딸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못 데리고 나왔습니다. 중국 친척들의 주선으로 성희 씨는 10대의 아들과 중국 동북지방에서 지낼 수 있었고, 두 딸은 북경에서 숨어 지냈다고 하는데요. 어느 날 북경에서 숨어 지내던 두 딸이 남한으로 가려다가 공안에 잡혀 북송되고 성희 씨의 거처까지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성희 씨는 두 딸들을 살리려면 자신이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위험하고 힘든 여정을 거쳐 2009년 한국에 입국했던 것입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던 성희 씨였기에 어떻게든 한국에서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성희 씨는 노력과 인내로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견뎌내고 이겨내면서 한국사회에 적응해 나갔고 돈을 벌었습니다. 성희 씨가 한국에 와서 2년 동안 모든 돈은 2400만원, 달러로 환산하면 18천 달러가 넘는 거금이었습니다. 성희 씨는 그 돈으로 북송되었던 두 딸들을 다시 탈북시키고 한국까지 데려왔습니다.

 

김인선: 성희 씨가 모았다는 거금 18천 달러를 단순 계산으로 하면, 한 달에 756달러(백만원)씩 꼬박 24개월을 모은 셈이 되는데요. 저축을 그만큼 하고도 생활이 가능했다는 말이죠?

 

마순희: 그럼요. 처음 탈북민들이 한국에 오면 정착지원금을 주잖아요. 성희 씨는 그 정착지원금과 60세 이상의 탈북민들에게 주는 노령장려금도 있었고 청소 일을 하면서 매월 받는 급여도 허투루 쓰지 않고 알뜰하게 모았습니다. 오직 자식들을 살려야 한다는 강한 모성애로 성희 씨는 매일 매일을 근면 성실한 노력과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두 딸과 중국에 있던 아들까지 성희 씨가 정착한지 2년 만에 모두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달은 아니지만 북한에 혼자 남아 있는 큰 딸에게도 연줄을 놓아 가끔씩 생활비를 보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엄마를 생각하는 자녀들의 마음

 

김인선: 북송되었던 두 딸과 아들 모두 고생이 심했을 텐데, 모두 데려올 수 있어 다행이었네요. 오직 자식 생각으로 일하며 한국생활에 익숙해졌던 성희 씨와 달리 장성한 두 딸과 아들은 정착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을까요?

 

마순희: . 성희 씨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자녀들 모두가 적응을 너무도 잘해줬다고 합니다. 장성한 두 딸은 그동안 엄마가 자신들을 데려오기 위해 어떤 고생을 겪어 왔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며 성희 씨에게 이제는 좀 쉬시라고 말릴 정도였다는데요. 성희 씨는 자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한국으로 올 수 없는 큰 딸을 돕기 위해 경제활동을 계속 하는 거죠. 엄마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세 자녀들까지 합심해 북한으로 돈을 보내고 있다는데요. 코로나가 심각했던 때 평양시 사정도 말이 아니었을 시기에도 성희 씨는 용케 선을 대서 보냈다고 합니다. 성희 씨의 수완도 집념도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인선: 무릎이 아프도록 청소를 열심히 했던 성희 씨, 이제는 몸도 생각해야 할 나이거든요.

 

마순희: 맞습니다. 성희 씨는 열심히 살다 결국 탈이 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자식들을 살려야 한다는 한 가지 일념으로 일밖에 몰랐고 아픈 줄도 몰랐지만 2년 후 세 자식을 모두 한국으로 데려 온 후엔 긴장이 풀려서인지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습니다. 성희 씨는 원래 무릎 관절이 안 좋았었다고 하는데요. 그제야 더는 견딜 수 없다는 생각에 탈북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는 국립의료원으로 찾았습니다. 탈북민 상담실도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병원인데요. 성희 씨의 무릎 상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게다가 혈압도 높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어지러움증으로 신경정신과에서 진단도 받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이런 몸으로 어떻게 청소 일을 할 수 있었냐고 할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성희 씨는 의료비가 걱정되었지만 상담사를 통해서 의료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비와 입원비는 거의 무료라고 할 정도의 혜택을 받아서 부담이 없었고 성희 씨는 한 달 여 간의 재활치료까지 모두 마치고 퇴원했습니다. 병원을 나와서 성희 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다시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처럼 힘든 일은 할 수 없었기에 성희 씨는 탈북민 대안학교에 취직했습니다. 탈북청소년들을 챙겨주는 사감으로 성희 씨는 친 혈육처럼 따뜻이 보살폈습니다. 다만 그 대안학교가 서울에서 거리가 너무 멀어서 오래 할 수 없었고 지금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하루 2-3시간씩 건물 관리를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금년에 50이 다 된 둘째 딸은 개인 찻집(카페)을 운영 중이고 셋째 딸은 세무서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10대였던 아들은 현재 30대가 되어 큰 중공업 회사 기술연구팀에서 근무 중입니다. 이제는 편안한 삶을 살아도 되는데 성희 씨는 지금도 부업 삼아 일을 하고 있는데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며 나이 들어 공부를 못 하면 몸으로라도 성실하게 일을 해야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런 성희 씨의 이야기를 통해 저도 자신이 선 자리에서 끝까지 최선을 다 하며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다시금 새기게 됩니다.

 

김인선: 게으름 피지 않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하성희 씨의 이야기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성희 씨처럼 78살에도 경제활동을 할 수 있을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

댓글 달기

아래 양식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십시오. Comments are moder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