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제주도 사투리가 더 편한 탈북민(2)
2023.05.18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다정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볼게요. 다정 씨는 세계적인 휴양 관광지로 평가받는 제주도에서 한국 정착을 시작한 분이었죠?
마순희: 네. 이다정 씨는 2008년 40대 후반의 나이에 한국에 입국했는데요.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마땅히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자그마한 섬에 가서 조용히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래서 탈북민 초기 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거주지 신청을 받을 때 아무 연고도 없으면서도 제주도를 선뜻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원 퇴소 후 제주도 배정받은 집에 가보니 텔레비젼 소리는 유달리 크게 들리고 자신의 말소리가 울리는 것 같아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두려움이 생기다 보니 바깥에 나가는 것도 망설여졌고 지리에도 익숙하지 않아 버스나 택시 타는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상한 곳에 내려줄 것 같아 거리가 꽤 되는 거리도 걸어 다니기 일쑤였습니다. 다정 씨가 제주도에 간 것이 11월이었는데 날씨가 궂거나 바람이 강하면 걷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버스 기사가 소개해 준
나의 첫 직장
처음 생각처럼 혼자 조용히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에 모임에 초대받으면 참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연말 행사에 참석하게 됐고 제주도에 정착한 탈북민들도 여럿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습니다. 두렵기만 하던 택시도, 버스도 더는 두려워하지 않고 노선에 따라 잘 찾아서 탈 수 있게 됐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낯선 환경에 두려워했지만 다정 씨는 점차 하나하나 익숙해 나갔고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버스를 이용하면서 기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다정 씨의 이야기를 듣던 기사님이 연락처를 달라고 했고 며칠 뒤 기사식당에서 일해 보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습니다. 다정 씨는 두말없이 승인했고 기사식당에서 첫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한국에 와서 처음 시작한 일인 만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얼마나 컸을까요. 하지만 일반 식당과 다르게 기사 식당은 첫차 운행을 하는 기사 분들과 막차 운행을 하는 기사 분들의 식사를 제공해야 해서 일찍 나오거나 늦게 퇴근해야 하고, 여느 식당보다 손님도 많고 무엇보다 일하는 중에 식사하는 기사 분들을 위해 손도 빨라야 할 거 같은데, 적응이 잘 됐을까요?
마순희: 네. 중국에서 8년을 숨어 살면서 안 해 본 일이 없는 다정 씨였지만 기사식당에서의 주방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교대 근무를 한다고 해도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 아침식사부터 저녁식사 준비까지 해야 할 일이 많았고 체력이 밑바탕이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 탈북민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아픈 사람이 많거든요. 다정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데다가 기사식당의 어려운 주방 일을 하다 보니 지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몸에 무리가 된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다정 씨는 북한에 두고 온 두 딸들을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서도 돈을 벌어야 했고 자신에게 일자리를 주선해 준 고마운 버스 기사님의 체면을 봐서라도 그만 둘 수 없었습니다. 주방 일을 더 열심히 하다 보니 식당을 찾는 기사님들도, 식당에서 일하는 동료들도 모두 다정 씨의 성실한 모습에 감복하고 또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기사식당에서 평생 배필을 만나다
다정 씨의 모습을 보고 이성적으로 다가온 분도 계셨는데요. 지금의 남편입니다. 14살 때부터 제주도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거의 토박이 제주도 사람이고 6형제의 장남으로 돈을 받고 일정기간 자동차를 빌려주는 렌터카 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남편의 적극적인 구애로 교제를 시작했고 다정 씨에게 이런저런 조언도 해주었습니다. 당시 남편은 다정 씨에게 지금의 현실에 충실한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길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라고 권유했고 다정 씨는 하나원에서 알게 된 요양보호사 일을 생각했습니다. 6개월 정도 일했던 기사 식당을 정리한 뒤 다정 씨는 학원에 바로 등록했고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당시에는 요양보호사 국가 자격증 제도가 도입되기 전이라 학원 교육과 실습을 마치면 바로 자격증이 나오던 때였거든요. 다정 씨는 자격증을 취득한 뒤 곧 바로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탈북여성들 상당수가 생활력이 강하고 일도 잘한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요. 다정 씨처럼 제주도에 정착한 경우라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예로부터 고기를 잡으러 멀리 배를 타고 떠난 남편을 대신해 혼자 아이를 키우다 보니 제주 여성들이 생활력 강하기로 유명하거든요. 다정 씨가 요양보호사로 일 잘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어르신들의 사랑을 받는
탈북민 요양보호사
마순희: 물론입니다. 다정 씨는 강단도 있다고 내심 자부하더라고요. 다정 씨는 일을 시작한 초기부터 센터의 신임을 받는 요양보호사였습니다. 시설에 계신 어르신들은 대부분 고령이시고 제주 토박이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다정 씨는 아직 그 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 하는 처지였지만 진심으로 또 눈치껏 어르신들에게 도움을 드렸습니다. 진심이 통했는지 어르신들은 우스개 소리로 너는 일본말을 하고 나는 중국말을 하는 격이라며 웃어 넘겼고 다정 씨를 누구보다 잘 따랐습니다. 나중엔 제주 풍습을 알려주시기도 하고 음식을 만들어 주는 어르신도 계셨습니다.
다정 씨의 애정운도 만사형통으로 교제를 하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도 하고 가정을 이뤘습니다. 남편은 다정 씨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알뜰하고 깐진 다정 씨를 만난 것이 일생의 행운이라고 하면서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는 남편이 옆에 있기에 다정 씨의 제주살이는 그만큼 더 수월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 때쯤 다정 씨의 작은 딸을 한국에 데려올 수 있었는데요. 사실 다정 씨는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올 수 있다는 어떤 할머니의 소개로 중국에 갔다가 8년을 살게 됐고 이후 한국행에 성공한 경우거든요. 다정 씨의 두 딸들은 엄마를 찾아 중국에 왔는데 큰 딸은 북송됐고 작은 딸은 아직 중국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정 씨는 작은 딸이 한국에 올 수 있도록 브로커를 찾았고 헤어진 지 10년 만에 만날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가정이 화목하고 안정되다 보니 다정 씨가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요. 사실 요양보호사 일이 몸을 써서 사람을 돌보는 일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도 들고 많이들 지쳐 하시더라고요.
마순희: 그럼요. 저도 해 보아서 알지만 노인복지센터에서의 하루는 정말 힘이 듭니다. 어르신들을 아침에 모시고 와서 차를 대접하고 건강 체조로 시작하는 하루 일과는 유치원 일과와 거의 비슷하게 흘러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어르신들 대부분이 고령이시라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긴장의 연속이거든요. 건강상태에 따라 적절한 프로그램과 물리치료, 식사, 낮잠, 놀이에 이르기까지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인데요. 하지만 다정 씨는 몸은 고단해도 다정하고 살뜰하게 어르신들을 보살펴 드렸습니다. 어르신들은 크고 작은 어려운 일들은 모두 도움을 요청했고 다정 씨가 연차로 하루라도 안 보이면 어디 갔냐고 어르신들이 찾을 정도였습니다. 일도 익숙해졌고 업무에 대한 인정도 받으며 다정 씨는 자신만의 삶을 멋지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르는 돌에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부부 공동명의로 집도 구입하고, 남편이 6형제의 맏아들이다 보니 맏며느리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다정 씨의 나이가 어느덧 60대 초반이 되었는데요.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지만 지금도 다정 씨는 일을 쉬지 않고 있습니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을 늘 신조처럼 간직하고 살아가는데요. 가끔은 탈북민들이 조직한 봉사단체에서 봉사도 하고 60대에도 자신의 일을 놓지 않고 오늘도 출근길을 이어가고 있는 다정 씨의 힘찬 발걸음에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김인선: 지금까지 일을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건 건강상에 별 문제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잖아요. 다정 씨가 앞으로 10년은 더 요양보호사 일을 하며 활기찬 생활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