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전기 기술자가 된 한의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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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아직 한여름이 된 것도 아닌데 요즘 날씨가 너무 더워요. 가만히 실내에 앉아 있는게 최고일 것 같은데요. 더운 날씨에도 땀 흘리며 운동하는 사람도 많고 컴퓨터 자격증 과정 등 뭔가 새로운 것을 준비하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우리 주변엔 열정적인 삶을 사는 분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저희 탈북민들 중에도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열정적인 분들이 정말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탈북 고령자들 중에도 한국에서 잘 정착해 행복하게 살아가시는 분들, 고령의 나이에도 현직에서 멋지게 근무하시는 분들까지 여럿 계신데요. 오늘은 그 중에서도 특히 모범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999년 50대 중반의 나이에 한국에 정착한 이철민 씨인데요. 전기설비를 다루는 기술자로 시작해서 77살이 된 지금까지 현직에서 열정적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고령의 나이에도 일을 할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은 역시 '기술'인 것 같아요. 그래서 미장이나 도배 등 다양한 기술을 뒤늦게 배우는 사람들도 많은데요. 이철민 씨의 경우 50대 중반에 한국에 와서 바로 전기설비 기술자가 됐다는 거잖아요. 아마도 북한에서부터 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짐작되는데요. 정착하면서 바로 일을 시작할 만큼 굉장히 열정적인 분인 것 같아요.

전기 설비 기술자가 된 한의사

마순희: 네. 이철민 씨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삶을 살아오신 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북한에서는 괜찮게 지내던 동의사, 한국식으로 한의사셨습니다. 원래 고향은 중국 흑룡강성이었는데 196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북한으로 나올 때 이철민 씨도 조선으로 나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본인이 노력만 하면 한의사가 되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일반 의사들은 의대를 반드시 나와야 했지만 한의사의 경우에는 독학으로 공부해도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고 시험에 통과하면 한의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철민 씨도 대학을 나와 혼자 공부해서 한의사가 됐는데요. 동해 바닷가의 한 도시에서 한의사를 하면서 큰 어려움 없이 생활했습니다. 다만 나이를 먹도록 결혼을 못해서 독신남으로 지내다가 북한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나 40대에 늦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9살 어린 철민 씨 부인도 결혼이 늦은 편이었는데요. 청진광산금속대학을 졸업하고 3대혁명소조와 현장경험을 쌓고 입당까지 하느라 결혼이 늦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조금 늦은 나이긴 했지만 두 사람은 오누이를 낳아 키우며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철민 씨의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의약품 공급 사정이 점차 열악해지면서 철민 씨는 병원에서 진료하는 날보다 산으로 약초 캐러 다니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의사로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철민 씨를 더 힘들게 했습니다.

의사도 속수무책이었던 고난의 행군 시기

김인선: 철민 씨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였잖아요. 고난의 행군 시기에 식량 사정이 악화되면서 굶어 죽지 않기 위해 탈북했다는 분들을 많이 봤거든요. 이철민 씨는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셨을까요?

마순희: 이철민 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우선 의료 체계의 붕괴는 환자 진료에 차질을 가져온 건 물론이고 한의사인 이철민 씨 본인의 건강조차 지킬 수 없게 했습니다. 당시 철민 씨는 급성 간질환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변변한 치료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선 건강부터 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중국 친척들의 도움을 받고 병 치료를 하기 위해서 철민 씨는 아내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기로 결심했습니다. 1996년 8월 증명서를 떼 가지고 두만강 연안까지는 무사히 왔지만, 장마철이라 무섭게 불어난 두만강물이 철민 씨 부부의 앞길을 가로 막았습니다. 그러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절박감으로 부부는 서로를 의지하며 필사의 힘을 다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두 사람 모두 초주검이 되어 맞은 편 대안에 도착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겨우 주변에 있는 집을 찾아가서 친척집에 전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연락을 받자마자 달려온 친척들의 도움으로 철민 씨는 병 치료를 시작했지만 아무리 좋은 치료를 받아도 이미 기울어진 병세는 하루, 이틀에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코 치료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친척들은 좋다는 약은 다 구해왔고 실력 있는 의사까지 모셔다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게 지내기를 3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드디어 철민 씨의 병세에 조금씩 차도가 보이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치료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버려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북한으로 나간다면 몇 년간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수용소행을 면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겨우 호전된 건강이 다시 악화될 것은 불 보듯 명백한 일이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철민 씨의 선택

김인선: 맞아요. 중국 친척들이 잘 돌봐줘서 북송 등의 위험은 피할 수 있어 다행이었던 것 같고요. 또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북한과는 많이 다른 바깥세상에서 살다 보면 심경의 변화도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마순희: 맞습니다. 철민 씨 역시 중국에서 체류하면서 남북한의 실상에 대해 잘 알게 됐고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도 위험했기에 아내와 함께 한국행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1999년, 50대가 넘어서 한국에 입국했는데요. 정착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북한에서처럼 한의사를 하려면 공부를 해야 했는데 새롭게 한의학 국가고시를 볼 생각이 없었기에 쉽게 취직해서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여 취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도 일자리 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에 특별한 기술도 없었던 철민 씨가 취업하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의사로 근무했다는 것은 한국에서 아무 도움이 못 됐고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던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김인선: 남북한의 의료 체계나 용어, 처치 등이 다르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 의사를 하려면 처음부터 다시 공부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한의학은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작심하고 몇 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북한에서처럼 한의사가 될 수 있었다는 탈북민 한의사의 인터뷰 기사도 종종 접할 수 있는데요. 이철민 씨는 한의학과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셨어요. 50이라는 나이가 부담이 된 걸까요?

마순희: 처음에는 이철민 씨도 북한에서 임상경험이 풍부한 한의사였었던 자신의 경력을 살려 한의학을 다시 배워서 의사가 될 생각을 했었다고 합니다. 처음 시작한 공부는 침구 전문 자격증을 위한 공부였는데 워낙 자신이 일해 온 분야였고 열심히 공부를 했더니 큰 어려움 없이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격증이 있어도 독자적인 의료행위를 할 수는 없었고 의사의 지시에 따라서만 환자치료를 할 수 있었기에 철민 씨 자신이 내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철민 씨는 반드시 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50이 넘은 나이에 젊은 사람들도 그렇게 힘들다는 의학 공부를 시작하기보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취직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실 철민 씨는 북한에서 한의사이기도 했지만 부업으로 라디오, 텔레비죤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가전제품들과 전기설비들을 고쳐주는 일도 했었기에 전기설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전기기술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 갔던 것입니다.

김인선: 한국에서 전기기술자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철민 씨. 북한에서 했던 부업이 한국에서는 본업이 됐는데요. 한국에서도 취미생활로 했던 일을 직업으로 삼은 분들이 많아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철민 씨는 본인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 같습니다. 일단은 한국정착이 순조로울 것 같은데요. 현실은 어땠을까요? 철민 씨의 못다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