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조여진 씨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갈게요. 여진 씨는 두 딸과 함께 제주도에서 정착을 시작했는데요. 지금의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장애인활동보조사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죠?
마순희: 네. 그렇습니다. 조여진 씨는 2007년 20살, 18살된 두 딸과 함께 한국에 입국했고, 곧바로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간병인 일을 시작했습니다.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간병인 교육을 받았던 경험으로 선택하게 된 일이었습니다. 딸들은 여진 씨를 도와 부업이라도 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여진 씨는 두 딸들에게 학업에 매진하라고 했는데요. 그동안 학업공백기가 길어서 중학교 과정부터 시작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공부만 시켰어도 또래들처럼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을 텐데 늦은 나이에 어린 동생들과 함께 중학교 과정을 공부해야 하는 딸들에게 미안한 마음 뿐이었습니다. 여진 씨는 하루도 쉬지 않고 간병 일을 했습니다.
과로와 영양실조로 쓰러졌을 때
만난 천생연분
여진 씨는 힘든 줄도 모르고 일했지만 한국에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과로와 영양실조까지 겹치면서 쓰러졌고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됐습니다. 그런 여진 씨를 챙겨주고 마음을 위로해준 분이 계신데요. 바로 적십자사의 정착도우미입니다. 여진 씨가 입원해 있는 동안 매일매일 찾아와 주었고 제때 밥을 챙겨먹지 않고 끼니를 자주 거르다가 영양실조까지 걸렸던 여진 씨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왔습니다.
김인선: 정착도우미는 여진 씨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 자연스럽게 지인을 소개해 주기도 했잖아요?
마순희: 네. 자그마한 회사를 경영하는 남성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몸과 마음이 약해진 여진 씨를 세심하게 챙겼고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밤낮없이 진심을 다하여 도와주는 그 도움과 관심에 감사한 마음은 있었어도 결혼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었는데 퇴원 이후에도 변함없는 그의 성실성에 감동하여 저런 사람이면 평생을 함께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남편은 이혼한지 5년 정도 되었고 혼자 살고 있었기에 외로운 두 마음이 쉽게 하나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가 장애인활동보조사가 된 이유
남편은 몸에 장애를 가진 친구의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여건이 안 되는 친구를 대신하여 직원으로 고용하고 친아들처럼 돌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워낙 성실한 남편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똑같았고 그 모습에 여진 씨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진 씨 역시 남편이 했던 것처럼 남편 친구의 아들을 가족으로 대하고 진심으로 보살폈습니다. 3년 동안 변함없이 진심으로 챙기는 여진 씨의 모습에 주변에서 장애인과 관련된 제도를 이야기 해주었고 여진 씨는 장애인활동보조사에 대해 처음 알게 됐습니다. 장애인활동보조사 교육을 받고 장애인을 돌보면 나라에서 보조금을 준다는 것이었는데요. 3년 동안 대가를 바라고 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교육을 받으면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남편 친구의 아들을 돌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교육받고 실습을 거쳐 자격증까지 취득했습니다.
김인선: 누군가를 돌본다는 의미에서 보면 요양보호사와 비슷하지만 장애인활동보조사와 차이점이 있잖아요?
마순희: 네. 우선 요양보호사는 노인을 돌보는 일인데 비해 장애인활동보조사는 장애인이 대상입니다. 요양보호사에 비해 교육기간이 짧고 자격증 취득도 쉬운데요. 장애인활동보조사 교육기관에서 일정한 교육을 수료하고 실습까지 마치면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습니다. 사회복지사나 요양보호사, 간호사 등 다른 자격증이 있는 사람은 전문 과정으로 32시간, 여진 씨처럼 다른 자격증이 없는 사람이라도 표준 과정 40시간 교육을 이수하고 10시간 이상 실습을 하면 누구나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진 씨는 지체하지 않고 교육을 받은 후 자격증까지 취득했습니다. 예전처럼 남편 친구의 아들을 돌보는 일을 똑같이 했지만 여진 씨에게 로임이 지급되기 시작했는데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돌봄을 하면서 정부의 지원금으로 로임까지 받게 되니 왠지 공짜로 돈이 생기는 기분까지 들었다는 여진 씨입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게다가 남편은 자상하고 사려 깊은 것은 물론 두 딸을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해 아빠 노릇을 해 주어서 여진 씨는 모든 일들이 감사하고 행복했다는데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지만 여진 씨를 만나던 날, 진심으로 부럽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여진 씨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노래 아시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여진 씨의 보금자리가 바로 그랬습니다. 장미꽃 덩굴이 담장을 둘러싼 2층 건물. 아래층은 남편의 회사 작업실이었고 위층은 두 딸의 방이랑 부부의 생활공간이었는데 2층 난간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정말 아름다웠거든요.
김인선: 재혼 가정, 그리고 남남북녀가 만난 통일 가정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정말 기분 좋아지네요. 그나저나, 당시엔 입원을 했을 만큼 여진 씨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의 건강문제는 없는 거죠?
마순희: 네, 모든 생활이 안착되어 가고 있었고 건강도 나날이 좋아졌는데요. 그래도 여진 씨는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라산에 올라 고사리를 꺾어 말리기도 하고 양파농장이나 감귤밭에 시간제 일을 나가기도 하면서요. 그래도 가장 첫 자리에 놓는 것은 역시 남편의 회사 일이었습니다. 여진 씨 남편은 컴퓨터 관련 회사를 운영하는데요. 간혹 사무실이나 가정집 철거 시에 폐기되는 컴퓨터들을 수거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일손이 필요하면 늘 여진 씨가 동행한다고 합니다.
수고하고 땀 흘리지 않고서는
땅의 소산을 먹을 자격이 없다는 신념
남편은 힘들거나 먼지 있는 곳에 여진 씨를 절대로 들여보내지 않으려고 모든 일을 혼자 하려고 애쓴다는데요. 그런 남편의 모습이 여진 씨에게 더 노력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수고하고 땀 흘리지 않고서는 땅의 소산을 먹을 자격이 없다’는 말을 신조처럼 달고 사는 여진 씨이지만 가끔 모르는 사람들은 남편을 잘 만나 호강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진 씨는 그런 말이 신경 쓰이지 않고 남편 앞에서나 딸들 앞에서는 물론 누구에게나 늘 당당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남편과 함께 하나 둘 일궈 나가는 자신의 노력이 함께 깃든 살림이기에 지금의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인선: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여진 씨의 모습에 딸들이 열심히 살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두 딸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요?
마순희: 네. 여진 씨의 두 딸들도 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하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큰 딸은 결혼도 했고 여진 씨에게 손주까지 안겨주었습니다. 지난해 여진 씨에게 또 다른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진 씨 남편이 1 년 전 제주 시내에 여진 씨 명의로 지하 1층, 지상 4층 되는 건물을 장만했다고 해요. 아래층에는 상가들을 입주시키고 위층에서 여진 씨 딸 내외까지 가족들이 모여서 살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자신들 뿐 아니라 여진 씨를 장애인활동보조사로 일하게 해준 남편 친구의 아들에게도 그동안의 급여를 차곡차곡 챙겨서 옆 건물을 사도록 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조여진 씨와 그 가족들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더 멋진 내일을 응원합니다!
김인선: 한국 남자를 만나서 정착한 탈북여성들의 성공적인 삶엔 선입견이 담긴 시선이 있기 마련인데요. 여진 씨는 스스로의 삶을 자신할 만큼 열심히 살았기에 사람들의 선입견에 당당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당당한 삶을 사는 조여진 씨! 앞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라며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