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공공기관 기획실 인재가 된 탈북여성(2)

0:00 / 0:00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정화영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화영 씨는 2004년에 한국에 입국한 후 15년 넘게 공공기관 기획실에서 근무 중인 인재라고 하셨잖아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정화영 씨는 대한민국에 입국한 지 6년 만에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누구나 선호하는 공공기관에 입사한 인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영 씨가 북한에 있을 땐 함경북도 동해 바닷가의 한 도시에서 축산 관련 일을 하면서 몰래 중국에 오가며 장사를 했던 평범한 분이었지만 지금은 많은 탈북민들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인재이신 거죠. 화영 씨가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기획자였기에 가능했습니다. 2004년 한국에 입국한 화영 씨는 탈북민 초기 정착 지원금으로 받은 돈을 브로커 자금으로 다 줘야 했기에 먹고 살기 위해 일자리부터 찾았습니다. 찾자고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일용직부터 시작했고 인력소개소를 통해 학교 기숙사 식당 보조 일부터 학교 내 환경미화원 일까지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업무에 따라 수입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 화영 씨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배웠습니다. 관련 자격증을 취득해 강사로 3년 정도 근무하다가 한 공공기관의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을 해 기획실에 입사하게 됐고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한국에서 모든 사무직은 컴퓨터 사용이 필수죠.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는 컴퓨터 활용 능력은 기본이고, 사업제안서 작성과 발표에 필요한 시각적 보조 자료 컴퓨터 프로그램인 파워포인트도 다룰 줄 알아야 하니까요. 화영 씨가 자유자재로 컴퓨터를 사용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당장 돈을 벌기 위해 식당 일, 청소 일부터 시작했던 것인데, 좀 더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 위해 화영 씨는 나라에서 탈북민들에게 컴퓨터를 무료로 배울 수 있게 지원하는 국비지원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하지만 국비 학원은 기초부터 시작해서 매일 몇 시간씩 배워주는 곳이었기에 나머지 시간이 아까웠던 화영 씨는 배우려면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마음으로 사비를 내서 또 다른 컴퓨터학원에도 등록했습니다. 비용도 많이 들고 수업시간이 늘어난 만큼 몸도 힘들었지만 한 달에 하나씩 컴퓨터 관련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화영 씨가 학원을 졸업할 당시에는 컴퓨터 강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향상되었습니다.

김인선: 컴퓨터학원에서 능력을 갖춘 졸업생에게는 취업을 연계해 주기도 하고요. 컴퓨터 관련 자격증이 다양하면 채용공고를 찾아보고 본인이 원하는 회사를 골라서 갈 수도 있어요. 컴퓨터 강의도 가능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화영 씨에게 다양한 기회가 있었겠는데요?

마순희: 네, 그렇습니다. 화영 씨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아 학원을 졸업한 후 지역의 복지관에서 컴퓨터 강사로 취직이 됐습니다. 하지만 취직했다고 끝은 아니었습니다. 컴퓨터 강사가 되었지만 등록하는 학생이 없으면 강의를 할 수 없었고 강의를 하려면 강사 스스로 학생들을 소개받아 등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주변에 아는 학생이 없었던 화영 씨는 학원 원장님께 어렵게 통사정하여 소개를 받았는데요. 첫 학생은 중학생이었습니다. 초짜 선생님이라 처음에는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하는 눈치였지만 화영 씨는 열심히 가르쳤고 그 결과 그 학생은 한 달에 하나씩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강사가 탈북민인 걸 알게 되고, 처음엔 다소 꺼렸던 학생들의 부모님도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성실한 모습에 화영 씨를 믿기 시작했고, 처음 교습 받던 학생의 누나까지 맡아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이 하나 둘 늘면서 원장에게도 인정받고 정화영 씨는 컴퓨터 강사로 3년 정도 일했습니다.

김인선: 학원 강사의 로임은 수강생 숫자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니까 학생 수가 많아진다는 것은 강사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물론이고 급여도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그만큼 학원 내에서 화영 씨의 입지가 견고해졌다는 건데, 학원 강사를 오래 하지는 않았다면서요?

마순희: 네. 좋은 일로 컴퓨터학원 강사를 그만두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강사 일을 하면서 공공기관에서 직원 모집을 한다는 채용공고를 접하게 됐고 화영 씨는 거기에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물론 컴퓨터 학원에서 강사로 계속 일을 해 나갈 수도 있었지만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모집하는 분야가 북한이탈주민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부서여서 화영 씨의 마음이 더 끌렸습니다. 공공기관이라 경쟁률도 높고 30대 후반, 나이도 적지 않아서 걱정됐지만 컴퓨터 관련 자격증과 강사 경력, 그리고 누구에게나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기에 화영 씨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도전을 외쳤고 결과는 합격이었습니다. 화영 씨는 기획실에서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화영 씨가 새로운 곳에서의 조직생활을 잘 해냈으면 좋겠네요.

마순희: 아무리 자신감을 가지고 입사한 새 일자리였지만 한국에서의 첫 회사 생활은 넘어야 할 난관 투성이였습니다. 새롭게 만들어진 부서이다 보니 화영 씨 스스로 해내야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화영 씨가 속한 곳이 기획부서이다 보니 매일 기획안을 만들어야 하는데 생각을 정리하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하루 종일 기획안이라고 썼다가 지우기를 수십 번, 겨우 만들어서 직속 상관에게 제출해도 이게 무슨 기획안이냐고 추궁을 듣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렇다고 과장님도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북한이탈주민지원 관련 업무 자체가 생소하고 처음 해 보는 업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쉽지 않았지만 기획안을 수십 번, 수백 번을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고, 그러다 보니 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화영 씨의 기획안 대로 취업 훈련과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서 회사에 취직하거나 창업을 하는 탈북민들이 있어 이 일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령 탈북민들을 위한 노래교실, 수지침 배우기, 민속무용 등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탈북민들의 심리적인 안정에 실질적인 도움을 줬고, 거기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면서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2004년 한국에 입국해서 컴퓨터 강사로 3년 일하고 공공기관에 취업해서 15년 넘게 근무 중인 화영 씨를 만나면서 업무 뿐 아니라 본인의 삶도 잘 기획해서 이끌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김인선: 일도, 삶도 멋지게 기획하는 화영 씨인데요. 그런데 지금까지 가족 이야기가 한 번도 없었어요. 화영 씨 곁에 심적으로 힘이 될 수 있는 가족이 있을까요?

마순희: 그동안 화영 씨가 가족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아 저도 잘 몰랐었는데요. 화영 씨에게도 남편과 아들이 있었다고 해요. 어린 아들은 북한에서 데려오지 못 했고 원래 몸이 허약하고 아픈 곳이 많았던 남편은 한국에 오긴 했지만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더라고요. 북한의 아들은 한국에 올 생각이 없었기에 화영 씨는 코로나로 연락이 끊기기 전까지는 북한의 아들에게 계속 돈을 보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들이 20대가 넘었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제 힘으로 생활을 개척해 나가기만을 빌 뿐이라고 합니다. 화영 씨 본인도 스스로 생활을 개척해 가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얼마 전, 화영 씨가 직접 지도한 탈북민 어르신들로 조직된 율동체조 팀이 한 대학의 율동체조 경연에 나가서 1등을 했다는데요. 그렇게 탈북민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정착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자신도 커다란 긍지와 보람을 느낀다고 합니다. 오늘도 무엇이든 마음먹기 탓이라며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정화영 씨의 발걸음에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김인선: 본인만큼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하잖아요. 화영 씨처럼 내 삶의 기획자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