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캐나다 추방을 반긴 이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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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요즘 여행사 별로 가을 여행지 기획전을 준비 중인 곳이 많다고 하는데요. 9월 마지막부터 시작되는 추석연휴부터 이어지는 공휴일까지 합치면 10일 정도 여유가 있더라고요. 장거리 여행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이미 여행 일정을 잡은 분들도 많은데요. 여행을 다녀오기 전과 후의 마음가짐이 조금이라도 달라져야 제대로 된 여행을 다녀온 거라고 해요. 여행은 인생의 새로운 변곡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요. 저는 여행에 대한 이 표현이, 마치 탈북민들의 삶을 말하는 것 같더라고요.

마순희: 네. 여행이 인생의 새로운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우리 탈북민들의 삶의 변곡점은 탈북과 대한민국 정착이라는 어렵고도 긴 여행에 비교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여행이란 떠났다가도 돌아오는 것이니까 우리 탈북민들은 긴 여행의 과정에서 잠시 새로운 곳에 정착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탈북민들이 파란만장한 여행의 긴 노정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갈 그 날을 위해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성공시대에서는 조금 더 특별한 여행 경험이 있는 분을 소개해 드릴게요. 강찬영 씨인데요. 대한민국에 와서 정착을 하다가 캐나다로 갔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하고 있으니 여행을 한 번 더 한 셈이네요. 찬영 씨는 2001년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목포에 정착해서 살았는데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캐나다에 갔다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 서울에 살고 있는 분이십니다.

김인선: 여행은 집을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거니까 찬영 씨가 좀 더 특별한 여행을 했다는 게 맞는 말이네요. 다른 탈북민보다 한 번 더 여행을 했다는 강찬영 씨는 어떤 분일까요?

마순희: 네. 찬영 씨의 여행길을 소개하려면 북한에서 지냈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할 것 같은데요. 강찬영 씨의 고향은 평양이지만 찬영 씨의 가족은 평양에서 추방되어 함경북도의 한 지방도시에서 살았습니다. 찬영 씨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군사복무를 하게 되었고 제대될 때에는 집단배치로 아오지 탄광에 배치 받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탄광이나 농촌에 인력이 필요할 때마다 집단배치, 혹은 무리배치라고 해서 학교 졸업생들이나 제대군인들을 본인의 능력이나 의사와 상관없이 한꺼번에 배치하거든요. 찬영 씨도 제대할 무렵 아오지 탄광의 인력사정으로 1000여 명의 제대군인들이 집단적으로 아오지 탄광에 배치 받았는데요. 가정도 꾸리고 평범한 탄광노동자로 큰 불만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가던 강찬영 씨도 고난의 행군은 결코 피해가지 못 했고 친구나 동료들이 시체로 죽어나가는 비참한 현실들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찬영 씨는 ‘나는 그렇게 죽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악착같이 버텼습니다. 하지만 배급을 안 주다 보니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아졌고, 사정은 점점 더 힘들어졌습니다. 찬영 씨는 시간이 날 때마다 식량 구입을 위해 배낭을 메고 농촌으로 쌀 구입을 다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몇 십리 길을 걸어서 다니다 보면 함께 가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며 서로를 알고 지내게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찬영 씨는 그때 60이 넘은 어르신을 알게 됐습니다. 그 어르신은 중국에 친척이 있는 덕분에 사사여행자들이 드나들면서 전해주는 나라 안팎의 정세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직장생활밖에 모르던 찬영 씨에게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분은 도무지 헤어날 길 없는 상황 속에서 출로를 찾지 못 하던 찬영 씨에게 한 줄기 희망을 품게 해 주었고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찬영 씨 인생에서 큰 전환을 준 귀인이라는 거죠?

마순희: 그렇습니다. 찬영 씨가 가족들을 평양 근처의 처형 집에 우선 피신시키고 어르신과 어르신의 30대 아들과 함께 1998년 2월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탈북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또 그 어르신 친척들의 도움으로 찬영 씨는 공안의 눈을 피해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하지만 몰래 숨어 사는 탈북민들의 삶이 오래 유지되지는 못하더라고요.

마순희: 맞습니다. 찬영 씨는 언제까지나 남의 신세를 지고 살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고 일자리를 찾았는데요. 중국의 한 농촌 집에서 30여 정보의 농사를 지으며 머슴 아닌 머슴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 했습니다. 한 동네에서 평소에 알고 지내던 조선족 지인이 있었는데 한 해 동안 농사지은 삯으로 받은 찬영 씨의 중국 돈 1000원을 갈취하는 횡포를 부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삯을 돌려달라고 찬영 씨가 정당한 요구를 했는데 그 사람은 인격적인 모욕까지 서슴없이 했고 강찬영 씨는 본인이 아무리 숨어 사는 처지라지만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결국 말싸움을 크게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찬영 씨가 탈북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됐고 그 사람은 그날 밤으로 파출소에 찬영 씨를 고소했습니다. 자칫 북송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찬영 씨는 한 기독교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천만 다행으로 강찬영 씨가 체포는 면할 수 있었겠지만, 찬영 씨의 신분이 노출돼서 걱정이네요. 전처럼 농사를 지으며 중국에서 지낼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맞는 말씀입니다. 찬영 씨의 절박한 상황을 알게 된 한 교인과 함께 날 밝기 전에 교회로 가서 몸을 피하여 체포를 면할 수 있었지만 강찬영 씨가 더는 그 곳에서 살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찬영 씨의 사정을 알게 된 교회 사람들은 조심스레 한국행을 제안했는데요. 한국으로 간다는 것은 가족들과의 영이별을 의미했기에 찬영 씨는 잠시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북한에서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다 보니 결국 강찬영 씨는 한국으로 오는 길을 택했습니다. 교회의 도움이 있었기에 찬영 씨의 한국행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강찬영 씨는 2001년 대한민국에 입국했고 처음 거주지는 목포였습니다. 특별한 연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목포 지역에 일자리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거주지로 정한 것이라 하더군요. 찬영 씨 예상대로 목포에는 일자리가 많았고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광어 양식장에서 청소 일을 하고 축사에서 분뇨 치우는 일도 했습니다. 처음엔 일거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주어진 일을 하는 했지만 몇 년 후부터는 목재 가공공장에 취직해서 정식 회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김인선: 강찬영 씨가 2001년에 한국에 입국했다고 했는데요. 당시만 하더라도 탈북민 지원정책들이 서울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지역마다 관련 일을 처음 맡은 직원들에게도 생소한 업무였을 테고요.

마순희: 맞습니다. 찬영 씨가 입국한 2001년이라고 하면 저희들보다도 한참 일찍 정착을 시작했던 것인데요. 당시는 탈북민들의 지역생활 정착을 돕는 하나센터나 북한이탈주민을 전담으로 하는 상담사는 물론이고 심지어 복지관에서조차 탈북민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을 때였습니다. 그때는 탈북민들에게 있어 신변의 안전을 지켜주는 담당 형사님들이 그나마 유일한 정착의 조력자들이고 또 취업의 안내자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찬영 씨도 이곳저곳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담당 형사님의 도움으로 목재 가공공장에 취직했던 것이었습니다.

찬영 씨는 직장생활이 대한민국에 대해 생각을 달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말합니다. 북한에서 남조선은 돈만 아는 썩고 병든 사회, 개인주의가 판을 치는 사람 못 살 곳이라는 교육만을 받아 왔었는데 막상 한국에 와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보니 누가 보든 말든 성실하게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찬영 씨는 목재 가공공장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보면 성실하게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같은 북한 출신의 여성을 만나 가정도 꾸렸었는데요. 관계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차라리 혼자 사는 편이 낫다는 생각에 헤어졌고 성실하게 일하던 찬영 씨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김인선: 찬영 씨에게 닥친 문제가 과연 뭘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리고요. 한국에 정착하면서 강찬영 씨가 처음 마주한 난관이 무엇인지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