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캐나다 추방을 반긴 이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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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강찬영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대다수의 탈북민들처럼강찬영 씨도 고난의 행군 시기, 중국으로 향했는데요. 중국의 한 농촌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머슴 아닌 머슴으로 살다가 신분이 노출됐었잖아요?

마순희: 네. 농사지은 삯을 받는 과정에서 강찬영 씨가 탈북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찬영 씨는 한 교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몸을 피했고 전후 사정을 알게 된 교회 측에서 찬영 씨의 한국행을 도운 덕분에 2001년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전라남도 목포에 거주지를 배정받은 뒤 찬영 씨는 닥치는 대로 이곳저곳에서 일을 하며 지냈는데요. 몇 달 후엔 담당 형사의 도움으로 목재 가공공장에 취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자리도 안정되고 찬영 씨는 성실한 자세로 일을 하며 한국 정착을 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목재 가공공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던 어느 날, 찬영 씨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국에 정착한지 7년이 됐을 때 언젠가부터 모르는 전화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는데 '너 죽으려고 아무 소리나 하고 다녀? 입 조심하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협박전화가 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탈북민들이 한국에 입국하면 기본적인 확인 작업을 거치게 되는데요. 그 조사과정에서 찬영 씨가 알고 있던 북한군 정보를 대답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과 관련한 내용으로 전화를 받고 보니 찬영 씨는 겁도 나고 불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찬영 씨의 신변안전에 도움을 주는 담당 형사에게 협박 전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전화번호를 바꾸는 등 여러 가지로 조심했지만 협박 전화는 계속 됐습니다. 상황이 달라지지 않자 찬영 씨는 더 이상 그대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목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실 그 때에 탈북자 사회에서는 영국이나 노르웨이, 캐나다 등 외국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떠날 수 있었습니다. 찬영 씨는 많은 탈북민들이 유럽에 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유럽의 국가들처럼 복지가 잘 되어 있으면서도 비교적 아는 사람이 적을 것 같다는 생각에 캐나다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캐나다에 도착해서는 알선 브로커들이 시키는 대로 대한민국 여권을 버리고 북한에서 온 난민이라고 진술했습니다.

김인선: 그러니까 한국에서 살다 온 탈북민이 아니라 북한에서 바로 캐나다로 간 난민이어야 정착이 가능했던 거군요?

마순희: 그렇죠. 무국적자여야 심사를 거친 후 영주권을 받고 살 수 있는데, 한국에서 살다 온 탈북민은 대한민국 여권을 소지한 한국의 국민이니까요. 그래서 유럽에 갈 때에는 한국 국적의 여권으로 합법적으로 가지만 도착한 후에는 여권과 신분증을 모두 없애고 북한에서 직접 온 것처럼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다행히 그대로 절차를 통과한 후 영주권을 받고 잘 지내는 사람도 있지만 후에라도 거짓말이 탄로나면 다시 한국으로 되돌려 보내지기도 합니다. 고지식한 성격의 찬영 씨는 한국에 입국했었다는 사실을 속이고 북한에서 오는 길이라고 말해야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진다는 브로커의 말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고 합니다.

신변을 위협하는 전화를 피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캐나다 생활은 훨씬 힘들었습니다. 언어의 장벽도 높았습니다. 찬영 씨가 마땅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습니다. 캐나다에서는 말도 통하지 않는 동양인 망명자에게 마땅한 일자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70-80대 교포들은 캐나다인들이 자신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침을 뱉고 코를 풀었었다고 회상하며 그때보다 인종차별은 많이 줄었지만 일자리를 구하려면 차별이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일자리는 주로 이미 자리를 잡은 한국 교포들의 주선으로 얻을 수 있었고 찬영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찬영 씨는 교포가 주인인 찜질방에서 청소도 했고 토론토 대학에서는 한국 출신 사장의 도움으로 2년 반 동안 청소미화원으로 일했습니다. 외국에서도 찬영 씨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바로 한민족, 한국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5년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난민 심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김인선: 난민들의 체류와 취업, 각종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각 나라에서 난민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난민 심사 제도가 체류연장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을 방지하려다 보니 조건과 절차가 꽤 까다롭다고 하더라고요. 찬영 씨의 난민 심사는 어떻게 진행됐을까요?

마순희: 네, 캐나다에서 생활한지 5 년이 되자 난민 심사가 이루어졌는데 찬영 씨는 한국에서 왔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면서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캐나다 정부의 지시를 받게 됐습니다. 많은 탈북민들이 캐나다에 오기 전 대한민국에 거주했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난민신청을 하는데 이미 난민 승인을 받은 사람들도 후에 그 사실이 알려지면 난민 지위를 박탈당하기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캐나다 정부는 찬영 씨에게 한국으로 돌아갈 항공권을 끊어주며 다시 캐나다로 돌아오려면 항공료를 물어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경고인 동시에 캐나다에 정착할 여유자금을 갖고 이민으로 오라는 뜻이었습니다.

김인선: 캐나다에 5년이나 살며 적응을 잘했을 텐데, 다시 한국에 가라니 날벼락이었겠어요.

마순희: 전혀요. 찬영 씨는 서운하기는커녕 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고 합니다. 5년 만에 다시 돌아 온 한국은 찬영 씨에게는 다시 찾은 소중한 보금자리였고 삶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 보아도 내 나라가 제일이라는 생각에 찬영 씨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게 됐다며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처음 정착하던 2001년에는 낯선 세상이었던 대한민국이 다시 돌아 온 2013년에는 정든 고향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찬영 씨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탈북민 지원제도도 많이 발전되어 있었고 하나센터도 전문상담사도 모두 찬영 씨의 새로운 출발을 도와주었습니다. 캐나다로 갈 때 정부에서 받았던 임대주택을 반납했기에 새로 집을 구해야 했고, 일자리도 잡아야 했는데 이 모든 것들은 물론, 새롭게 시작하는 한국생활에 있어 필요한 많은 부분을 도움 받았습니다. 해외에 나가서 온갖 차별을 받으며 설움을 당해 보니 내 나라가 좋은 줄 절실히 알게 되었다는 찬영 씨는 한국에 살 때에는 몰랐지만 해외에 나가 보니 이 나라가 자신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뭔가를 잃어보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안다고 하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담당 형사와의 소중한 인연도 계속됐습니다. 한 자리에서 다양한 일자리를 선보이는 취업박람회 소식을 전해주었던 것입니다. 찬영 씨는 그곳에서 고속터미널 사장이 직접 나와서 청소업무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을 접하게 되었고 자신이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중국에서나 한국에서, 그리고 캐나다에서 경험했던 일을 바탕으로 고속버스를 청소하고 버스 화물을 운반하는 일이 그리 힘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급여도, 식비도 다 제공되고 모든 처우도 마음에 들어서 지원했고 취업에 성공했습니다. 찬영 씨는 무엇보다도 동료들과 잘 어울리며 외로움도 덜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강찬영 씨는 60세가 넘을 때까지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일했습니다. 지금은 찬영 씨 나이도 65세가 넘다 보니 일을 그만두고 충청남도의 한 지방 도시에서 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북한과 중국, 캐나다에 있을 때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돈을 모아 내 집 한 칸을 마련하고 싶다고 한 소원도 이루었고, 오늘도 하루하루를 편하게 활기차게 보내고 있는 강찬영 씨. 찬영 씨의 건강한 삶을 응원할게요.

김인선: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강찬영 씨의 삶은 충분히 성공한 삶이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