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보험설계사 윤광남 씨(3)

서울-김인선 xallsl@rfa.org
2019-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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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서울 한양대학교 병원.
사진은 서울 한양대학교 병원.
연합뉴스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올해로 남한생활 10년째 되는 37살 윤광남 씨에 대한 이야기. 지난 시간에 이어 나눠볼게요. 윤광남 씨는 보험계약의 체결을 중개하는 보험설계사로 4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처음 보험설계사가 되려고 했을 때 일부 탈북민이 허위 보험금을 탄 사건이 생기면서 보험회사에선 광남 씨를 거들떠도 안 봤습니다. 하지만 광남 씨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설득을 했죠? ‘함께 일해 보지도 않고 속단하지 말고 자신을 고용해서 지내 본 후 평가를 하십시오’ 라고요.

마순희: 네. 광남 씨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어렵사리 회사에서 취업을 승인했습니다. 입사 3년 만에 보험설계사들의 꿈이자 목표인 ‘보험왕’이 됐을 만큼 열심히 일했습니다. 새로운 보험계약을 체결하는 실적도 좋고 보험을 유지하는 고객도 많아야 ‘보험왕’이 될 수 있는데 그 일을 광남 씨가 해낸 거죠.

김인선: ‘보험왕’이 되기까지 광남 씨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을까요?

마순희: 그것이 바로 보험영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고 또 제일 어려운 일이기도 하죠. 그 벽을 넘지 못 해서 그만두는 사람이 많거든요. 광남 씨도 처음에는 아는 사람이라야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탈북민 지인들이 전부였답니다. 보험영업을 계속 하려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인맥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으니까요. 가장 어려운 것이 말투였다고 합니다. 고민 끝에 광남 씨는 쉽게 고쳐지지 않는 말투를 두고 자신만의 영업 비법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에 자기소개부터 솔직하게 하는 것으로 말이죠. 이런 솔직함으로 영업을 하다 보니까 한 사람의 고객을 유치하게 됐고 또 그 사람 소개로 다른 고객을 만날 수 있게 된 거죠.

김인선: 인맥이 만들어진 거네요. 제 친구도 보험일을 하는데요. 소개를 연이어 받아 인맥이 커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거든요.

마순희: 네. 윤광남 씨는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식구처럼 챙겼더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고 믿어주는 것 같다면서 웃어보이더라고요. 윤광남 씨의 이런 노력으로 ‘보험왕’이라는 칭호를 받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고객이 아니라도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광남 씨의 모습을 보고 ‘어차피 보험을 들 거면 이 사람한테 맡겨봐라’ 하고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거든요. 보험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만 하고 계약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상담해주고 들어주는 게 광남 씨 영업비밀의 하나였는데요. 언젠가 그 사람도 고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고 합니다.

특히 지금의 광남 씨를 만든 것 중의 하나가 보험설계사 일을 처음 시작했던 마음가짐 그대로라는 점입니다. 사람을 만났을 때 거절을 당하는 것이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게 무슨 대수겠냐고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좋은 사람도 만나고 까다로운 사람도 만나고, 물론 거절하는 사람도 많지만 두렵지는 않다고 하면서 웃더라고요. 모든 사람이 다 내 고객이 될 수 없는 거라고 하면서요. 보험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보장을 받아야 하고 보험료도 십 수년간 납입해야 하는 것이기에 고객의 입장에선 가입도 신중하게 해야하는 만큼 광남 씨는 그저 꾸준히 성실한 자세로 설계사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보험설계사 일이 고객이 보험 상품에 가입하게 하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월 보험료를 잘 내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또 보험금을 지급받아야 할 사안이 생기면 보험료청구까지 도와주어야 하기에 정말 쉽지 않습니다.

김인선: 하는 일이 굉장히 많네요.

마순희: 네. 보험금을 청구하는 것도 절차가 있고 필요한 서류들도 갖추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서 저부터도 보험금을 받을 사유, 예를 든다면 병원에 입원했다든가 할 때에는 보험설계사에게 제일 먼저 연락하곤 하거든요. 광남 씨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4년 정도 근무하면서 관리해야 할 고객도 300명이 넘는다고 하니까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중에는 유달리 까다로운 고객도 있고 당연히 자신이 준비해야 할 서류조차도 준비하지 않고 설계사만 찾는 고객들도 있어서 일일이 해결해 주다 보면 하루가 언제 지나가는지 모를 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일들이 번거롭거나 시끄럽다고 생각된 적은 없는지 물어보았더니 오히려 한 가지, 한 가지 일을 처리해 나갈 때마다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안도감과 감사한 마음이 더 크다고 합니다.

김인선: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저부터 광남 씨로 보험설계사를 바꾸고 싶네요. 이런 분이 별로 없거든요.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계약 실적을 올리고, 유치한 고객 관리도 쉽지 않아서인지 제가 가입한 보험 중에 담당 설계사가 그만뒀다는 연락을 종종 받아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제가 가입한 보험도 벌써 세 번째 담당자가 바뀌었답니다. 하긴 저 역시 6개월 정도 근무하고 일을 그만두었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저는 광남 씨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믿고 가입을 한 고객을 만나기 위해 전국을 누비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상황에서든 고객의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기본자세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보험상품이 계속해서 변하기도 하고 또 추가되는 사항이 많은데 광남 씨는 고객이 어떤 내용을 물어도 즉각적으로 대답해줄 수 있을 만큼 관련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느리지만 차근차근, 광남 씨만의 노력이 있었기에 팀장의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고 3백 명이 넘는 고객을 확보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김인선: 그 정도면 광남 씨가 받는 보수도 꽤 높겠는데요? 보험설계사의 소득은 영업직 중에서도 가장 높은 것으로 유명하더라고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아마도 회사원으로 근무하던 때보다 세 배 정도는 될 겁니다. 사실 돈만 밝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보수는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회사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것만큼 회사를 위해 더 헌신해야겠다는 마음도 더 커질 거고요. 처음 광남 씨가 보험회사에 입사할 때의 꿈은 ‘한 달에 1,780달러- 2,670달러(200-300만원) 정도 벌 수 있으면 좋겠다’ 였답니다. 그런데 그 꿈은 진즉 이뤘고 지금은 처음 꿈꾸던 수입의 두 배는 충분히 넘게 받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광남 씨도 더 성장하고 회사에 대한 기여도도 더 높아졌다는 거겠지요. 보험설계사가 하는 일이 보험을 팔아야 하는 영업직이다 보니 보험 판매가 숙명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리한 영업은 절대로 안 한다는 윤광남 씨입니다. 이왕 하는 판매이면 고객인 가입자에게도 이득이 되고 판매자인 설계사도 이득이 되어 모두에게 유리할 수 있도록 일하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김인선: 광남 씨의 머릿속에는 온통 보험과 고객만 있을 것 같아요.

마순희: 보험설계사로서의 윤광남 씨라면 충분히 그렇죠. 하지만 광남 씨에겐 또 다른 수식어가 있습니다. 탈북민 봉사단 ‘우리새싹회’ 회장인데요. 봉사단체를 꾸리게 된 사연은 제가 광남 씨를 만나보면서 가장 가슴 찡했던 이야기였습니다. 북한에서 가장 어려웠던 1997년, 광남 씨는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함께 중국으로 가게 됐습니다. 말도 모르는 산동성의 한족마을에서 13년을 살면서 겪어온 어려운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죠. 한번은 사경에 처한 탈북여성을 목숨 걸고 탈출하도록 도와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 여성이 한국에 정착하게 되면서 광남 씨에게 한국으로 올 수 있는 정보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길을 다 함께 떠날 수 없어서 누이동생은 두고 어머니와 함께 먼저 한국에 가기로 했다는군요. 한국에 도착한 광남 씨는 초기 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나와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됐는데 자꾸 눈물이 나더랍니다. 엄마랑 있어도 외로움이 느껴졌다는 거죠. 어머님과 함께 있는 자신도 외로움에 울음이 났을 지경이었는데 혼자 나온 탈북민들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들의 외로운 마음을 헤아리게 되면서 탈북민 모임을 구상하게 됐던 거죠. 처음엔 작은 규모로 모임을 하는 정도였는데 점차 확대되면서 ‘우리 새싹회’라는 탈북민 봉사단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김인선: 광남 씨의 하루가 더 바쁘게 느껴지는데요. 아쉽게도 마쳐야 할 시간이 됐어요. 중국에 남겨졌던 여동생과는 만났는지..., 결혼은 했는지... 윤광남 씨의 이야기는 한 주 더 이어집니다.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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