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첫 직업이 내 마지막 직업 (2)

0:00 / 0:00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이경희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북한에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을 했던 경희 씨는 한국에 정착하면서 육체적인 노동에 해당하는 환경미화원 일을 시작했어요. 탈북민들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탈북을 하는데, 경희 씨를 보면 과연 더 나은 삶이 맞을까... 라는 생각이 저는 들더라고요. 하지만 경희 씨는 자신이 선택한 환경미화원 일을 한국정착 초기부터 지금까지 무려 17년 간 하고 있다고 해서 궁금하더라고요. 경희 씨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말이죠. 이경희 씨의 삶의 비법이 뭘까요?

북한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경희 씨

환경미화원이 된 지금, 과연 만족하며 살고 있을까?

마순희: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점차 자신만의 가치관, 인생관이 생기잖아요. 경희 씨가 생각하는 인생관이 바로 그녀만의 삶의 비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경희 씨는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어떤 자세로 일하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을 하니 북한에서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졌어도 남한에서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을 못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빨리 받아들였습니다. 경희 씨는 하나원을 나오면서부터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라도 광주에서 한국 정착을 시작한지 20여일 쯤 됐을 때, 탈북민들의 지역 정착을 도와주는 한 봉사단체(적십자) 회원 분의 추천으로 대형 상가건물 환경미화원이 됐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회사에서 같은 업무를 하고 있고요.

경희 씨가 한국에 와서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살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진 건 탈북 후 중국에서 보낸 시간 덕분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고급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잘 나가는 기업소의 회계업무를 도맡아 보는 부기로 근무하기도 했었지만 그 일이 새로운 환경에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으니까요. 경희 씨의 경우 중국에 사촌 언니가 살고 있었기에 도움을 받으려고 1997년 딸과 함께 탈북했는데요. 중국의 도시가 아니라 농촌이었습니다. 농촌살림은 크게 도움을 기댈 형편이 못 되었고 경희 씨는 딸과 함께 화룡현의 한 절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김인선: 중국에서 산 속 깊은 곳에 숨어 살아도 탈북민들은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지낼 수밖에 없잖아요. 경희 씨도 마찬가지였다면서요?

잘 나가는 기업소의 경리가

두 번의 북송과 영양실조, 방광염으로 만신창이가 되기까지

마순희: 맞습니다. 경희 씨도 절에서 숨어 지냈지만 두 번의 북송을 경험했으니까요. 첫 번째 북송은 2001년 9월이었습니다. 1997년 3월에 탈북했으니 중국에서 4년 6개월을 지낸 후에 잡혀가게 된 거죠. 북송 후 경희 씨는 노동단련대에서 1개월 정도 온갖 고생을 다 하고 나왔는데요. 5개월 후 다시 탈북했습니다. 하지만 2004년에 다시 잡혀 나가게 되었는데 두 번째 북송 때에는 방광염을 심하게 앓게 되었습니다. 경희 씨는 굶다시피 하면서 벌목장에서 나무를 끌며 힘든 일을 다 했습니다. 결국 영양실조와 방광염이 겹쳤고 경희 씨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 몸이 부었습니다. 경희 씨의 몸 상태는 단련대에서 죽으면 데려갈 사람이 있는지 찾아 볼 정도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중국에 있던 딸이 브로커를 통해 돈을 넣었고 힘든 상황에 처한 경희 씨를 구했습니다. 또 한 번 북송을 당하면 그땐 생명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경희 씨의 딸은 엄마를 위해 한국행을 주선했고 2005년 이경희 씨는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두 번이나 북송을 경험하고 고초를 겪었다고 하니 경희 씨의 건강이 걱정이네요. 탈북민들이 한국에 도착하면 크고 작은 이상증상으로 치료도 받고 병원생활을 하기도 하는데요. 경희 씨의 몸 상태는 어땠나요?

하나원 퇴소 후

20일도 안 돼 선택한 나의 직업

마순희: 한국 입국초기에는 괜찮았습니다. 처음에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와서 20일도 안 되어 취직을 하다 보니 건강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단순노동이라고는 하지만 힘들었고 처음 접하는 미화원 업무가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경희 씨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루라도 빨리 몸에 익혀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중국생활과 두 번의 북송과정에서 받은 몸과 마음의 상처가 회복되기도 전이었지만 무사히 대한민국에 정착한 것에 감사하고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다는 것이 너무도 감사했기에 자신만 잘 하면 된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워낙 성실한 성격인 경희 씨는 젊은 사람들도 따라오지 못 한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깔끔하고 신속하게 맡은 바 일을 해 냈습니다. 그 모습에 경희 씨는 책임성이 높다고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들부터 직원들 모두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일부 동료들 중에는 퇴근시간 전까지 요령껏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경희 씨는 일에서 만큼은 근무 시간 내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했습니다.

김인선: 고용주 입장에선 경희 씨가 아주 이상적인 직원인데요. 같이 일하는 동료들 입장에선 불편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경우에 1시간에 한 번씩 쓰레기통을 비우면 되는데 경희 씨가 수시로 쓰레기통을 확인하고 비우면 동료들은 일을 안 하는 사람처럼 비쳐질 수 있으니까요.

너무 열심히 일해도 왕따?

마순희: 맞습니다. 그런 면들이 경희 씨와 동료들 사이에서 문제가 됐고 함께 일하는 다른 사람들과 화합이 잘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1시간에 한 번씩 건물 곳곳을 청소하는 것이 건물 내에서 일하는 환경미화원의 주 업무이기에 그 일만 충실하면 되는데요. 경희 씨의 눈에는 그 모습이 시간 때우기 식으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경희 씨는 근무하는 8시간 동안 청소는 수시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니까요. 이런 생각의 차이 때문에 동료들과 부딪친 경희 씨는 정신적으로 압박을 많이 느꼈다고 하는데요. 이후로도 한결같은 경희 씨의 모습에 사람들이 인정해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받았던 정신적인 압박감이 경희 씨의 건강을 악화시켰습니다. 환경미화원 일을 시작한지 2년 정도 지났을 때 경희 씨는 외상성 스트레스라는 병명으로 끝내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정신적인 충격으로 생기는 외상성 스트레스는 사실 북한에서 혹은 탈북과정에서 겪은 인권유린 등으로 탈북민들이 많이 겪는 정신적 질병인데요. 치료를 해야 하는 줄 모르고 그냥 넘어가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하지만 내가 지금 힘들다, 슬프다, 속상하다... 라는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하면 나아질 수 있거든요.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고 하는데 경희 씨도 직장 상사의 도움이 컸다면서요?

북한에서의 생활과 탈북과정의 후유증으로

몸보다 마음의 병이 더 큰 탈북민들

치료약은 역시 사람?

마순희: 네 맞습니다. 경희 씨가 신경쇠약으로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환경미화원들을 담당하는 직장상사인 소장님이 여러 번 병원을 찾아와서 병문안을 했고 하루속히 퇴원해서 다시 업무에 복귀하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경희 씨는 그동안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던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는 것 같아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즈음 많은 직원들이 인원 조정으로 일자리에서 밀려나는 상황이었습니다. 경희 씨가 속한 업체에서는 2년마다 재계약을 하는 계약직 근로자로 환경미화원을 선발했기 때문입니다. 재계약을 안 하거나 층수별로 배정된 환경미화원 인원수를 줄이는 과정이 있었는데 이경희 씨는 예외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경희 씨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다시 직장에 복귀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17년을 한 자리에서 묵묵히 성실하게 자신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경희 씨랑 통화했는데 요즘은 오후 교대라 3시에 출근한다고 하면서 오랜만에 긴 시간 회포를 나누었습니다. 멀지 않은 앞날에 한번 꼭 만나자고 약속도 했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는 경희 씨가 앞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김인선: 경희 씨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좋은 평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남이 보든 말든 자신의 삶을 잘 살다보면 주변에서 '저 사람, 참 괜찮네'라는 말을 하니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