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는 오카리나, 오카리나 연주가 김 명 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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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김인선: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성공시대를 하면서 많은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있는데요. 평균연령대가 4~50대잖아요.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은 20대 청년이라면서요?

마순희: 네. 오늘 소개할 사연의 주인공은 27세의 오카리나 연주가이자 명 오카리나 대표 김명 씨입니다. 김명 씨의 고향은 평안북도 구장군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 나오는 영변의 약산이 지척이죠. 김명 씨를 만나보았더니 남한의 또래들이 유치원에 갈 나이부터 지금까지 산전수전을 다 겪어 왔다고 표현할 정도로 사연들이 많았습니다.

김인선: 보통은 어른들의 인생을 말할 때 그런 말을 하잖아요. ‘내가 살면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어봤다’ 이런 말이요. 고생을 많이 해봤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많은 것을 경험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그래서 여러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제 27살 된 김명 씨에겐 어떤 사연이 있을까요?

마순희: 네. 김명 씨를 처음 만나게 되면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동안인 데다 고생이라고는 안 해 본 것 같은 훈훈한 미소와 부드러운 외모가 친근함을 더하는데요. 저도 처음엔 말쑥한 외모에 사투리 한 점 없는 서울말씨라 김명 씨가 탈북자인 줄 전혀 알지 못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그의 입을 통해 들려준 사연은 하나하나가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김명 씨는 6살이던 1997년에 가족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압록강은 워낙 강폭이 넓어서 건너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건넜는지 물었더니 삼촌의 어깨에 목마를 타고 건넜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몇 년을 중국에서 살게 됐지만 12살 때 외할머니, 외삼촌과 김명 씨는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북송을 당했다고 합니다. 12살 소년에게도 수용소 생활은 혹독했다는데요. 힘에 부친 강제 노동과 반복되는 학습, 그리고 배반자라는 오명으로 온갖 수모를 다 겪어야 했답니다.

2년여 만에 수용소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어머니와 연락을 할 방법이 없었고 4년을 혼자 연명하다가 16살에 가다가 죽더라도 어머니를 만나야겠다는 신념으로 탈북을 결심했다고 해요. 하지만 국경지대까지 걸어서 오면서 갖은 고생을 겪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열흘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북한에서 하루나 이틀을 겨우 풀칠이나 할 정도로 버텨보기도 했었는데요. 정말 배가 고프면 아무 의욕도 안 생기더라고요. 김명 씨의 경우 사나흘 굶고 나니 아무 생각이 안 나고 사람이 음식으로 보일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열흘이나 굶었으니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결국 국경지대에 도착했을 때에 길가에 의식을 잃고 쓰러지게 되었답니다. 다행히 한 아주머니가 쓰러진 김명 씨를 발견해서 집에 데리고 갔고 온갖 정성을 다 해서 다시 건강을 회복했다고 해요. 그분은 고맙게도 탈북 경비로 쓰라며 돈까지 주셨는데 북한 돈으로 5천원, 약 90달러 정도 되는 돈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김명 씨는 탈북에 성공했고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와 이모가 있는 대한민국으로 오게 됐습니다.

김인선: 친인척 간에도 보위부에 신고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국경에서 김명 씨를 구해 준 그분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김명 씨는 없었겠어요.

마순희: 맞습니다. 김명 씨가 참 괜찮은 분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동정심이 있어도 당장 내 집에 먹을 것이 없다면 쓰러진 소년을 보아도 가슴 아파할 뿐 잠자리를 나누고 밥을 나눌 수 없거든요. 김명 씨를 살려준 분은 마음도 착하고 조금은 여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분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김명 씨는 16살에 대한민국 품에 안길 수 있었는데요. 이제는 꽃길만 걸으면 좋으련만 5살부터 탈북과 정치범수용소 감금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제도권 교육은 받지 못했기에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탈북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에 다녔지만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고 결국 검정고시로 초등학교 과정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까지 학력 인정을 받게 됐다는데요. 대학진학을 앞두고 고민이 되더랍니다. 아무리 검정고시를 통과했다고 해도 정규교육을 받은 친구들처럼 대학공부를 따라갈 자신이 없었던 거죠. 결국 김명 씨는 대학교 공부보다 사회경험을 선택했는데요. 대한민국의 직업이라는 직업은 가리지 않고 경험해 나갔다고 하더군요. 식당 설거지부터 여러 음식점 주방에서 요리를 하기도 했고 신축빌라 매매를 중개하는 부동산 중개사도 해보고 북한에서 혼자 있을 때 농사도 지어 보았기에 한국의 과학적인 농사일도 해봤을 정도로 몸을 아끼지 않으며 대한민국 직업은 다 경험하며 자본주의를 공부하려 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식당 설거지부터 부동산 중개사, 과학 농사까지, 이렇게 다양한 일을 해봤다는 건 돈을 많이 벌어보고 싶었다는 얘기로 들리는데요?

마순희: 네. 처음엔 돈을 목표로 했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그리고 어른들의 조언을 들으면서 공부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에 들어가게 됐는데 김명 씨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시간이 찾아 왔었던 겁니다. 대안학교들에는 자원봉사자들이 많이 찾아오는데요. 봉사자들이 저마다의 재능으로 탈북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잖아요. 이때 오카리나 연주가의 음악수업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김명 씨는 이때 오카리나라는 악기를 처음 접했는데 강사가 ‘고향의 봄’이라는 곡을 연주하더랍니다. 그 곡을 듣고 있는데 김명 씨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더군요. 외삼촌의 어깨에 목말타고 건너던 순간, 혼자 국경을 건널 때의 공포, 북한에 잡혀와 당했던 온갖 고문들, 그리고 12살에 생이별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의 마음들이 한꺼번에 스치더니 이내 그 것들이 봄 눈 녹듯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고 해요. 음악이 사람의 응어리진 마음을 보듬어 주고 치유해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는 김명 씨. 그때부터 오카리나와 인연을 맺게 된 거죠.

김인선: 맞아요. 오카리나 소리를 들으면 매력에 빠지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오카리나는 ‘작은 거위’라는 뜻을 지닌 손바닥 크기의 악기로 입으로 불며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았다 열었다 하며 소리를 내잖아요. 남한에서 오카리나는 접할 기회가 별로 없는 악기인데요. 북한에서는 어떤가요?

마순희: 북한에서 그런 악기이름을 들어본 적 없습니다. 가장 대중적인 악기는 아코디언(손풍금)이고 일반 대중들에게 유명한 것은 역시 통기타, 더 흔한 악기는 아마도 하모니카일 것 같은데요. 어찌 보면 오카리나와 비슷한 소리가 아닐까 싶은 피리나 가야금 연주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오카리나라는 악기는 북한에 없지요. 김명 씨 역시 같은 탈북민이기에 남한에서 처음 오카리나를 접했는데요. 앞서도 말했다시피 오카리나 연주로 ‘고향의 봄’을 듣는 순간 그동안 겪었던 모든 아픔이 치유되는 듯 마음의 위안을 얻었고 물질보다 정신적인 충족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요. 김명 씨의 명함엔 ‘오카리나로 마음의 한을 풀어내다’ 이렇게 쓰여 있어요.

김인선: 맞아요. 그렇게 어떤 방법으로든 터뜨리고 나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은데 사실 그러지도 못하고 안으로 삼켜야 하는 슬픔이 있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속으로 우는데요. 김명 씨는 오카리나 소리에 그 속울음이 터지면서 아픔이 치유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마음의 위안을 얻은 오카리나로 새 인생을 사는 김명 씨의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 이어가도록 할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