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TV의 역사 (1)

서울-문성휘, 김태산 xallsl@rfa.org
201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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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TV는 지난달 보통강전자제품공장에서 시야각이 넓고 전력소비가 적은 신형 에너지절약형 곡면액정텔레비전(커브드 TV)이 생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중앙TV는 지난달 보통강전자제품공장에서 시야각이 넓고 전력소비가 적은 신형 에너지절약형 곡면액정텔레비전(커브드 TV)이 생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이 시간 진행을 맡은 문성휘 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해외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책임지고 체류하던 중 2천년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김태산 선생과 함께 합니다.

기자: 김태산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김태산: 네, 문 기자님 오래간만입니다.

기자: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전 시간에 저희들이 북한의 방송역사, 그리고 북한의 선전선동수단들이 붕괴되던 그 역사에 대하여 돌이켜 보았는데 지금까지 북한에 남아 있는 선전선동수단, 사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노동신문’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노동신문’도 이젠 부수가 확 줄었고 보는 사람들이 얼마 없지 않습니까? 대신에 지금은 컴퓨터가 발전해 가지고 인터넷으로 ‘노동신문’이랑 이런 걸 본다고 하는데 사실 잦은 검열 때문에 개인집에서 인터넷을 거의 사용 안하고 있습니다. 그저 유일하게 북한 사람들이 시시각각으로 접할 수 있는 선전선동수단, 언론수단은 텔레비죤(TV)이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김태산: 네, 그렇죠.

기자: 그런데 그나마 북한은 텔레비죤도 평양만 방송되는 텔레비죤이 있고 지방까지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방송은 ‘조선중앙텔레비죤’ 딱 한 개 채널이 아닙니까?

김태산: 그런데 그 한 개 채널도 24시간 계속 방영하지는 않죠?

기자: 네, 예전엔 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 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오후 3시부터 밤 11시까지.

김태산: 좀 앞당겼네요?

기자: 네, 그리고 주말에는 여전히 9시부터 11시까지 방송을 합니다.

김태산: 오전 9시부터 저녁 11시까지라는 거죠?

기자: 네, 주말이라고 하면 한국은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로 생각하고 이틀간 휴식을 하는데 북한은 주말이라고 하면 일요일밖에 없지 않습니까?

김태산: 네, 철저히 일요일만 주말이라고 하죠.

기자: 네, 그런데 이러한 텔레비죤 마저도 전기가 안와서 주민들이 거의나 못 보고 있다고 합니다.

김태산: 아, 여전히 그렇군요.

기자: 네, 얼마전에 쏴 올렸다는 그 ‘화성 15’ 말이죠.

김태산: 아, 그 미사일 말이죠?

기자: 네, 김정은이 ‘화성 15’ 미사일 발사를 직접 시찰했다고 하는데 북한 사람들 아직 그 장면을 못 본 사람들 엄청 많다고 합니다. 거의 대다수라고 하면 되겠죠.

김태산: 아니 그럼 전기가 안 들어와서 텔레비죤을 못 보다나니 그렇게 됐군요?

기자: 네, 뭐 지어는 ‘화성 15’를 발사한지 한 주일 지나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골 같은데서 누가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모르고 있었다. 이런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김태산: 지구상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오히려 미사일을 발사한 나라 인민들은 모르고 있다는 건데 참 웃기는 일이군요.

기자: 네, 그만큼 전기사정이 어렵다는 거죠. 전기사정 때문에 사실 텔레비죤도 북한의 선전선동수단으로서 그렇게 큰 위력을 발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그래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선전선동 수단이라는 게 텔레비죤이니까 그래서 저는 항상 궁금했거든요. 제가 태어나서 철이 들고 보니까 벌써 텔레비죤이 있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등에 업혀 텔레비죤 구경을 가던 생각이 나거든요.

김태산: 아, 그렇습니까? 그럼 그게 몇 년도 쯤 입니까?

기자: 그게 한 75년 그때인가? 그때에 ‘교육자 대회’, 무슨 대회 참가자들과 (조총련) 귀국자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냐하면 ‘대남 가족’들, 말하자면 남한에 간첩으로 파견된 사람들의 가족들에겐 텔레비죤을 주었죠.

김태산: 말하자면 “(노동당 조직지도부 간부) 11과” 대상들이죠.

기자: 그때 텔레비죤이라는 게 제 관식이었죠. 전자관식이어서 전기를 넣으면 한 2분 동안 ‘쏴∼’ 하는 소리가 나다가 화면이 나왔죠.

김태산: 전자관을 달구어야 그다음엔 화면이 나오기 시작했죠. 저도 이제 텔레비죤을 1972년도 이후에 제가 군수공장에서 일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1972년도 이후에 들어서면서 북한에서 무슨 대회들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여기에 우리공장 지배인, 당비서 이 두 사람은 큰 공장 간부들이니까 매번 큰 대회들에 자주 참가하곤 했는데 그때 올라가서 텔레비죤을 선물로 받아 왔어요. 선물로 받아와서 우리공장 노동자들이 수천명이 됐는데 그때 텔레비죤은 지배인과 당 비서네 집밖엔 없었어요. 그때 명절 때면 우리 합숙생들을 놀려오라고 해서 당 비서네 집에 가서 텔레비죤이라는 걸 보던 생각이 납니다.

기자: 네, 제가 어렸을 땐 텔레비죤이라는 게 마을에 얼마 없었으니까 그때엔 영화관들이 굉장히 붐볐죠. 한 번씩 영화를 한다고 하게 되면 그 영화표를 떼는 게 정말 전쟁이었죠. 그리고 텔레비죤도 새로 나온 영화를 한다든가 아니면 주말엔 외국영화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럴 때면 아닌 게 아니라 텔레비죤이 있던 집들은 문도 닫지 못하던 생각이 납니다. 지어는 부뚜막에 가마위에까지 올라 앉아 텔레비죤을 보는 사람들까지 있었거든요. 저는 저의 앞집에 대회에 참가했다가 텔레비죤을 선물로 받은 분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분이 교육자였어요. 그래서 소련의 “템프”라는 텔레비죤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 텔레비죤을 보기 위해 주말에 사람들이 꽉 찼는데 마음씨가 굉장히 착했어요. 그런데 그 집의 자식들은 오히려 사람들이 꽉 차는 게 싫어서 다른 집으로 놀려 갑니다. 거의 매일 저녁이죠. 그 텔레비죤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못하니까 집주인들은 먼저 잡니다. 옷을 입은 채로 어느 구석에서 자면 텔레비죤을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이 마지막에 그 텔레비죤을 꺼줍니다. 그런 생각이 나는데 저의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게 “저 텔레비죤이라는 걸 언제부터 알게 되었나?”하고 물어보니까 아마 60년대 초, 그러니까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에 앞으로 텔레비죤이라는 게 나온다, 앞으로 텔레비죤이 나오면 여기 앉은 자리에서 미국에서 축구를 하는 것도 볼 수 있고 영국에서 전쟁을 하는 것도 여기 앉은 자리에서 다 볼 수 있다, 그렇게 상식적으로 알려주었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궁금한 건 선생님은 처음 텔레비죤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 게 어느 때였어요?

김태산: 네, 맞습니다. 저도 이제 1960년대 중반, 학교 다닐 때 그때 선생님들이 “이제 집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는 그런 전기기계가 나온다. 그런 전기기계가 나오는데 그걸 텔레비죤이라고 한다” 그래서 “저건 무슨 꿈같은 소릴 하냐?” 저는 필림을 돌려서 보는 영화를 어떻게 집에 앉아서 볼 수 있냐? 라디오 듣는 것처럼 그렇게 볼 수 있다고 해서 꿈같이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이제 1970년대 그때 조선노동당 5차대회가 열리지 않았습니까? 그때 이제 “전국의 텔레비죤화”를 실현할 데 대한 김일성의 교시가 있었어요. 그때 김일성이 “우리도 텔레비죤화를 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아, 텔레비죤이라는 걸 우리도 만들긴 만드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땐 만들지 못하고 소련에서 ‘템프’, ‘포톤’을 비롯해서 그때 큰 나무함으로 해가지고서 얼마나 무거웠어요? 우리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당 비서, 지배인의 집에 가서 보게 되면 큰 나무상자만한, 지함으로 말하면 ‘5호 지함’ 같은 크기가 그만한데 무게가 한 30~40kg 나가는 것 같았어요. 그때로부터 이제 1975년도 어느 큰 회의에서 참가했던 우리 지배인과 당 비서가 천연색 텔레비죤이라는 걸 선물로 받아왔어요.

기자: 네,. 북한에 아직까지 선전선동수단으로 남아있는 텔레비죤의 역사, 그 시작에 대해 오늘 참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지금까지 김태산 선생님과 함께 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태산: 네, 저도 오늘 참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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