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얼굴] 실향민 김 할머니 "북한에 두 동생 살아있어..."

고향을 떠나온지 50년 60년이 넘어도 실향민은 어린 시절 고향의 향수를 그리며 통일의 그날 꼭 한번 고향을 가겠다고 말합니다. 실향민의 애절한 사연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소망을 소개하는 ‘보고 싶은 얼굴’ 오늘은 워싱턴 일원에 사는 ‘개성이 고향인 김 할머니의 고향 그리는 마음’을 전해 드립니다.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09-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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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임진각에서 열린 합동망향제에 참석한 실향민이 '고향의 봄'을 부르다가 오열하고 있다.
2006년 9월 임진각에서 열린 합동망향제에 참석한 실향민이 '고향의 봄'을 부르다가 오열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질문 : 김 할머니 고향이 어디세요?

답변 : 저의 고향은 개성입니다.

질문 : 개성 고향 지금도 눈에 선하시겠습니다.

답변 : 전에 개성에 관광도 가곤 했잖아요. 우리 동생이 개성을 다녀왔다는데 동생은 고향을 모르지요. 우리 나이나 돼야 기억을 하지요.

질문: 김 할머니 옛날 고향을 회고해 주시지요. 어떤 곳인지...

답변: 우리 동네에는 추궁이란 곳이 있습니다. 오월 단옷날이면 그네를 매고 모시 적삼을 날아갈 듯이 입고 양산 받쳐 들고서는 그네 뛰는 날이에요. 그래서 볼만하고요. 우리 어렸을 때 생각하면 용수산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병들과 우리가 뛰어가서 산의 물을 담아와서 미역 냉국을 타 먹곤 했는데 그 당시는 냉장고도 없던 시절 아닙니까? 산에 가서 그 물을 떠다가 미역냉국 말아서 점심 먹고 참 깨끗하고 좋은 곳입니다. 철로 길 넘어가면은 과수원도 많고 땅콩밭도 많습니다.

질문 : 고향 친구들 생각도 나시지요?

답변 : 윗동네 아랫동네 패싸움도 하곤 했는데요. 저는 중립이지요.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고 철이 없고 어렸을 때이니까.. 시키는 대로 하니까 동네 아이들이 우리 집에 주로 모였어요. 이 동네가 옛날에 나무 장거리였데요. 그래서 나무도 많이 쌓아놔요. 나무를 쌓아놓으면 몇 트럭이 아니고 집채 같은 게 몇 채가 들어 않죠. 동네에서 숨바꼭질할 때에는 그 위에만 올라가요. 나무 위에 올라가서 엉덩이로 비벼서 숨으면 밤새도록 못 찾아요. 그렇게 재미있게 놀던 시절이 있었고요. 또 전기가 나가면 동네 아이들이 다 모여서 전기회사를 가지요. 우리 동네 불 나갔어요. 그러면 전기 들어오게 해주던 때가 생각도 납니다.

질문 : 김 할머니 피난시절 이야기 들려주세요?

답변 : 제가 어려서 자라던 곳에 기찻길이 있습니다. 기차 소리가 나면 뛰어나가서 가족 중에 누가 오나 하고 내다보다 가족 중의 누가 오면 역전까지 숨이 차게 달려가지요. 마중가는 거지요. 그런 철로길이 있었는데요. 철로길하면 떠오르는 것은 6.25 동족 상잔입니다. 개성이 삼팔선 밑이지 않습니까? 3.8선 이남.. 그날이 주일인데 기차 소리가 나서 할머니 우리 서울 안가냐고 물으니 서울은 무엇 하러 가느냐 (서울 갔으면 했는데) 그 기차 소리가 마지막이었고, 인민군이 밤사이 송학산에 올라가서 태극기를 내리고 공화국기를 달았어요, 그리고 몰래들 기어나와서 많은 군인을 포로로 잡아가고 엄청나게 죽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남부고 북부는 송학산의 밑입니다. 만월대도 있고 선죽교도 있는 곳이 북부입니다.

그 당시 국방군과 인민군이 일대일로 만나면 힘센 사람은 살고 힘 약한 사람은 죽고 해서 송장들이 즐비했어요. 갑작스러운 동족 상잔의 전쟁을 맞지 않았습니까? 당시에 비행기 폭격은 심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또래의 아이들이 남자나 여자나 몰려다니던 시절이니까요. 12살 13살이니까 비행기가 폭격하면 신난다 하고 국방군이 와서 역전을 쳤다. 어디 쳤다고 해 높은 곳에 올라가서 구경들하고 그랬는데 개성이 살기가 좋은 곳이에요. 6 25때도 큰 피해 없이 그렇게들 살았는데.. 조금 전 기차길 이야기를 왜 했느냐면 거기에 구름다리가 있어요. 국군이 수복하고 나서 다시 남하하면서 그 구름다리에 남포를 박고 다리를 끊기 때문에 빨리 피하라고 흑인 병사가 얘기해 줬어요. 그때 당시에는 일본어를 많이 사용했잖아요. 일본을 거쳐온 미군들도 일본말을 하니까 빨리 피하라고 했는데 우리 할머니가 이가 아파서 입이 붓고 많이 아팠는데 아이들도 어리고 해서 피난 가는 일은 꿈도 못 꿨어요. 이웃도 더러 피난을 가고 1.4 후퇴 때니까요. 이웃이 피난을 안가냐고 물었어요, 우리가 5남매였고 엄마 아버지 할머니 등 8식구가 살았습니다. 이 대식구가 어디로 가서 사느냐며 우리는 그냥 피난 안 간다.. 그러고 있었어요. 그런데 흑인 병사가 와서 빨리 나오라는 바람에 얼떨결에 8식구가 보따리 하나씩을 짊어지고 나왔지요. 그렇게 나왔는데 임진강 있는 곳까지 오기 전에 개성 건너서 본동이란 데가 있어요. 봉동, 장단, 문산이 있는데요. 봉동에 왔는데 거기 사둔 집이 있었는데 애들이 4살 6살로 10리 길을 걸으니까 다리가 통통 붓는 거예요. 그래 도저히 갈 수 없고 해서 할머니가 동생들과 여기에 있겠다. 너희나 가라고 했습니다. 6.25가 나던 그 전년에도 한 달 이상 서울에 있다가 간 적이 있어요. 그때 생각하고 서울로 피난 간다니까 남동생이 좋아서 자기도 가겠다고 했는데 너는 할머니와 있어라 그래서 저는 막냇동생을 업고 (아버지 어머니가 말을 못해요).. 그래서 제가 길잡가 됐지요. 맏딸이니까 밥한 사발 얻어먹으려 해도 제가 나서야 하고 통역을 해도 제가 해야 하니까.. 그래서 막냇동생과 엄마 아버지하고 피난길에 나섰는데 장단 채 못 미쳐와서 사람들이 다시 돌아가더라고요. 다리는 끊겼고 조각배로 건너가는데 도저히 갈 수가 없다고 되돌아가신 분이 대단히 많아요. 그중에 우리 고모도 만나곤 했는데 우리는 어떻게 조각배를 탔어요. 타고서는 문산에 와서 문산서 기차를 잡아타고 서울로 가게 됐습니다. 당시 사진으로 보아서 알겠지만 기차 타기가 굉장히 어려웠지 않아요? 기차 꼭대기도 타고 그러던 상황이었는데 그래도 용케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왔지요. 그래서 가족이 헤어지게 됐습니다.

질문: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은 몇 명입니까?

답변: 세 명입니다. 할머니와 두 동생 하고요. 휴전선이 그어질 때 소식을 들었어요. 그때 나온 사람도 있고요. 그때 나와서 사시는 분도 꽤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가족을 못 데려왔는데 저희 부모님이 서울로 피난 나와서 여자 동생만 셋을 낳으셨는데 한 명은 죽고 두 명만 살아서 여자동생이 세 명이 있고요. 남자 동생은 북한에 있는 거지요. 그래서 아버지가 늘 북한에 있는 아들을 그리워하셨거든요. 저희 아버지는 2006년도에 돌아가셨습니다. 87세에 돌아가시자 북한에 있는 남동생의 이름이 6차 이산가족상봉의 명단에 올랐다고 했습니다만. 아버지가 계셨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찾아봤을 텐데 아버지 돌아가신 해에 그런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은 내가 죽으면 끝이지요.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그게 제일 걱정입니다. 여기 있는 동생은 얼굴도 모르니까, 여기서 태어났으니까.. 그러나 죽기 전에 가족이나 한번 찾아보면 소원이 없겠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알 수가 없네요.

질문: 북한에 있는 동생에게 문안의 편지를 띄어주세요.

답변: 살아 있어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을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언니로서 이날까지 동생들과 아버지 어머니 모시고 살았었는데 용케도 오래 사셔서 87세까지 엄마도 아빠도 사셨단다. 늘 너희를 그리워하시면서 눈을 감지 못하고 돌아가셨단다. 빨리 통일이 돼서 살아있으면 만났으면 좋겠는데 나도 70살이 넘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는데 통일되기를 기원한다. 지금 만나면 얼굴이나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죽기 전에 만날 수 있을지 걱정이구나 하루속히 통일되기를 기원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게 해주시면 만날 수 있을 텐데 기도하는 길밖에는 없구나. 살아 있으면 몸 건강이 있기를 바란다.

MC : 실향민의 애절한 사연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소망을 소개하는 ‘보고 싶은 얼굴’ 오늘은 워싱턴 일원에 사는 ‘개성이 고향인 김 할머니의 고향 그리는 마음’을 전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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