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노동당 간부들에게] 한국전 책임은 김일성 일당에 있어

강인덕· 전 통일부장관
2023.07.26
[북한 노동당 간부들에게] 한국전 책임은 김일성 일당에 있어 서울 한국전쟁 전시관에서 방문자들이 포스터를 살펴보고 있다. 왼쪽부터 북한의 김일성, 중국의 마오쩌둥, 러시아의 이오시프 스탈린.
/AP

당 간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7 27일은 군사정전협정 조인 7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50 6 25일 새벽 4시 여러분 당의 초대수령이던 김일성과 그 수뇌부가 천인공노할 무력 남침을 자행하여, 수백만의 인적 피해와 천문학적인 재산손실을 가져온 6.25전쟁이 3 1개월, 1129일 만에 주고받던 포화를 멈춘 날입니다.

 

1945 8월 태평양전쟁을 자행했던 일본이 미국의 원자탄 세례를 받고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습니다. 미국과의 강화조약을 의뢰 받은 소련의 스탈린은 이를 태평양 진출 교두보 확보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보면서 대일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렇게 거의 무혈점령으로 한반도의 38도선 이북 땅을 차지했습니다.

 

소련군에 의해 교육받고 세뇌된 소련 극동군 88특수정찰여단 소속의 조선인들 김일성, 최용건, 김책 등 50여 명 이른바 빨치산파들은 스탈린의 지령 하에 지금 북한 땅에 로동당을 창당하고 소련의 괴뢰정권을 세워 해방직후부터 5년간 무력남침을 위한 군사력을 구축했습니다. 남한 국방군의 무력보다 우위의 군사력을 구축하게 되자 소련군 고문단들이 작성한 작전계획에 의해 1950 6 25일 새벽 4시 무력남침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전쟁 초기 여러분 당의 선대들 즉 김일성, 최용건 등은 득의양양했습니다. 6.25당시 남북간 군사 전력을 비교해보면 북한군의 경우 지상군 10개 사단 12만 명과 지원부대 6만여 명, 해군 4700여 명, 공군 2000여 명, 육전대 9000여 명, 19 8800여 명인데 비해 남한국군은 지상군 8개 사단 10만여 명뿐이었습니다. 장비면에서 북한군은 박격포 1730, 곡사포 552, 전차 242, 자주포 176, 항공기 211대 등이 있었으나 남한 국군은 겨우 박격포 960, 곡사포 91문 그 외에 자주포와 전차는 단 한 대도 없었으니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남침 1개월을 앞두고 김일성은 모택동 중국공산당 당수에게 요청하여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장개석 국민당군과의 전투에 참가하고 있던 조선인 2 9천여 명을 인수받아 서울을 공격할 사단에 배치했습니다.

 

남침 15일을 앞두고 서울 공격에 6개 사단을 수원, 강릉, 원주 등 침공에는 4개 사단을, 그 외에 유경수 소장 지휘 하에 105전차 여단을 비롯한 동해안 상륙부대, 오토바이 부대 등으로 기습 남침을 자행했습니다. 그리하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3개월 만에 대구와 부산을 잇는 지역만을 남기고는 남한의 전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게다가 인민군의 진격에 뒤따라 남파된 로동당원들이 이른바 남조선을 적화하기 위해 지주, 자본가, 지식인에 대한 전면적인 숙청작업에 착수하며 수만 명의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김일성 일당의 무력 남침은 남한 인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강한 의지와 미국,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16개국 병력의 참전 그리고 덴마크, 노르웨이 등 5개국의 의료지원단 파견, 아르헨티나와 오스트리아 등 유럽과 중남미 39개국의 재정지원을 받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1950 9 15,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은 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해서 반격에 나섰고 한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협공작전에 의해 남한 땅을 점령했던 인민군이 지리멸렬하여 패배했고 무너진 남침사단병력은 38도선 이북으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반격에 나선 유엔군과 한국군은 10 1일을 기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여 10 20일엔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으로 계속 진격했습니다.

 

이처럼 당초 전 한반도를 적화시켜 극동의 국제공산당의 혁명기지, 군사기지로 만들려던 스탈린의 계획은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스탈린은 중국공산당 모택동과 협의하여 수십만의 중공군을 파견했습니다. 이제는 말 그대로 공산진영과 자유진영간의 국제전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몇 차례의 유엔군, 한국군과 중공군, 인민군과의 대규모 공방전이 있은 후 1951 11월부터는 교전 당사자간 본격적인 정전 협의가 시작되었습니다. 232km 전선에서 양측 접선을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협상은 결실을 보지 못하고 전투는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다 1953 3월 스탈린이 사망한 후 정전협정이 급진전되어 4개월 후인 7 27, 6.25 이전의 38도선이 아니라 오늘의 휴전선을 기선으로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발효되었습니다.

 

당 간부 여러분! 전쟁 3년 동안 입은 인명피해는 밝혀진 것만 하더라도 남한의 국군 62, 유엔군 16, 북한인민군 93, 중공군 100, 민간인 250, 이재민 370, 전쟁 미망인 30, 전쟁고아 10, 이산가족 1000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의 절반이 넘는 1900만여 명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정전 후 미, , 소 등 관계국은 6.25전쟁을 종결 짓기 위한 정치회담을 1954 4월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치회담도 2개월 만에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오늘날까지 70년간 정전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당 간부 여러분! 누가 이 엄청난 전쟁의 책임을 져야합니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모한 남침을 자행한 김일성 일당, 조선노동당이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침략전쟁을 시작한 자가 전쟁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휴전 후 지금까지 여러분 당은 마치 7.27정전이 무슨 전쟁 승리의 날처럼 허위 날조하며 대규모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금년은 70주년이라 예전보다 더 성대하게 기념행사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과연 전승기념일인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패배기념일입니다. 군사평론가들의 주장처럼 김일성이 대규모의 정규군을 지휘했던 경험만 있었더라도 김일성은 이 무모한 6.25전쟁을 자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전경험이라면 10여 명의 빨치산 전투를 경험했던 김일성이기 때문에 스탈린의 음흉한 계획에 놀아나 민족에 대한 천인공노할 대역죄를 범한 것입니다.

 

당 간부 여러분! 최근에 와서 여러분 당은 종전선언을 채택하자는 주장을 내놨습니다. 여러분 당의 주장은정전이란 교전 쌍방간 전투행동을 일시적으로 정지하는 것으로 전쟁의 종결이 아니며 정전협정 유지만으로는 완전한 평화가 담보될 수 없다. 따라서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계구축을 위한 정치적 의지의 발현으로 종전을 선언하는 것이 첫 공정이다. 당사국들의 정치적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종전선언부터 채택하여 전쟁상태부터 끝내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주장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과연 여러분 당이 한반도에서 완전하고 항구적인 공고한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참되고 진정한 의지가 있는가 하는 것이 의문입니다. 이런 의지가 있다면 오늘날 김정은이 기를 쓰고 또다시 북한 인민을 고난의 행군으로 내몰면서 핵과 미사일 개발을 할 리가 없습니다. 남한인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아니 전 세계가 규탄하는 핵미사일 개발에 전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 간부 여러분도 상호 신뢰할 수 없는 사이라면 상대방이 하는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종전협정 나아가 평화협정으로 오늘의 정전협정을 바꾸고자 한다면 먼저 세계가 규탄하는 핵미사일 개발부터 중단하여야 합니다. 다시는 6.25와 같은 기습공격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무모한 불장난, 기만 전술은 이제 그만해야 할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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