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2023년) 12월 개최된 북한 노동당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이 남북관계를 ‘동족’이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로 규정하고 남북 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할 경우, 남한을 압도적인 핵무력으로 평정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북한이 지금까지 견지해온 통일지향 노선을 폐기하고 한반도 두 개의 국가론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인데요. 그 후 북한은 신무기 개발과 무력 도발의 강도를 한층 높이면서 대남, 대미 위협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북한 정권 수립 이후 꾸준히 주창해온 평화통일이라는 용어를 각종 선전문에서 삭제하는가 하면 통일에 관한 선전 구호와 상징조형물들을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김정은이 당 전원회의에서 남북한 두 개의 국가론을 들고나온 것은 일반적인 예상을 벗어난 발언입니다. 북한은 김일성에 의해 북한정권이 수립된 이후 한반도(조선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임을 주장하며 노동당의 우선 사업을 한반도(조선반도)의 통일이라고 선전해왔습니다. 1950년에는 조국통일을 명분으로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전쟁을 일으켰고 그 후에도 기회있을 때마다 통일을 앞세우며 남한정부를 반통일 세력이라고 비난해왔습니다. 지난 1991년 탈냉전 기류에 편승해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남북한은 국제사회에서 두 개의 나라로 인정되었지만 김일성, 김정일은 오히려 ‘하나의 나라’를 강조하면서 남한이 분단의 고착화를 통해 두 개의 나라를 지향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김정은이 갑자기 남북한은 별개의 다른 나라이며 남한은 평화통일의 대상이 아니라 적대국으로써 무력 평정의 대상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북한의 이 같은 태도 변화에 대해 전문가들은 몇 가지 분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러시아로부터 대량의 경제, 군사 지원을 받게 된 김정은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피폐해진 경제를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해석입니다. 경제사정이 어느 정도 호전되면서 한미일동맹에 대항해 북중러동맹을 구축해 한반도에서 군사적 열세를 만회할 수 있는 국면전환을 시도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하노이 미북정상회담 실패 후 대미, 대남 군사적 위협의 강도를 높여오던 김정은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는 북한 주민들의 민심이반이었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의 군사, 경제적 지원으로 경제적인 파국은 면하게 된 김정은이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상태를 조성해 민심을 다잡는 한편 미국과 남한을 강하게 압박해 핵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 한다는 전문가들의 해석도 있습니다. 북한이 대남전략을 크게 전환했다는 데에는 모든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상당수 북한전문가들은 김정은의 이번 ‘두 개의 나라’ 발언이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했습니다. 북한이 남한을 흡수통일 하기가 불가능해졌고 오히려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 가능성이 증대되는 현실에서 이를 차단하고 이른바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로서 현 체제를 지키기 위한 새로운 대남전략이라는 설명입니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크게 밀리지 않던 북한은 1980년대부터 체제의 경직성과 경제의 난맥상 때문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부문에서 남한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할 정도로 후퇴하고 있습니다.
작년(2023년) 북한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마이너스 0.2%를 기록해 2020년(-4.5%), 2021년(-0.1%)에 이어 3년째 역성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목 국내총생산은 36조 2천억원으로 남한의 2천 161조 8천억원의 60분의 1 수준입니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북한이 143만원, 남한이 4천 249만원으로 남한 사람의 개인 소득이 북한 주민의 개인소득보다 29.7배나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남북한의 경제적 격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북한당국의 흡수통일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합니다.
북한에서 장마당세대라고 불리는 90년대 이후 출생자들의 한류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무조건적인 수용이 북한 당국의 큰 걱정거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동경이 흡수통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김정은이 위기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현 체제를 포기하지 않는 한 평화통일은 고사하고 무력에 의한 남한 흡수통일도 불가능해졌고 오히려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 가능성이 높아지는 현실을 감안하면 김정은이 선대 수령들이 내세운 ‘조선반도 통일론’을 고집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합니다.
김정은이 한반도 두 개 국가론과 함께 남한을 적대국가로 규정한 것은 남한에 대한 핵 사용을 정당화하고,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선언이란 해석도 있습니다. 북한은 그동안 핵 개발의 목적이 미국의 핵 위협에 대한 자위권이라고 주장해왔고 동족, 즉 남한을 향한 핵 공격의 가능성은 부인해왔습니다. 그러나 2022년 4월 김여정과 김정은이 남한을 향한 핵 공격 가능성을 언급했고 그해 9월에는 핵 무력 정책을 법령에 규정하면서 남한이 핵 공격 대상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남한을 적대 국가로 확정하고 핵 공격 위협을 하면서 실질적인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기 위한 전략적 변화를 택했다는 평가도 나왔습니다.
김정은의 속마음이 무엇이든 북한의 소위 ‘선대 수령’들도 인정한 한반도 단일 민족, 단일 국가 정책을 폐기하고 남한을 적대국이라며 핵 공격 운운하는 행태가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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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