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서울] 소녀, 엄마꽃으로 피다 (2)
2024.10.22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11살에 유서를 쓴 소녀가 있습니다. 소녀는 대학 재학 중이었던 2013년,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프랑스어와 한국어로 출판했습니다. 이제는 두 딸의 엄마이자 작가 또 북한 인권 활동가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요.
1999년에 탈북해서 2006년 한국에 입국한 함경북도 은덕 출신의 김은주 씨의 얘깁니다. ‘2024 벽을 넘은 인터뷰’ 두 번째 주인공으로 관객을 만난 은주 씨의 이야기, 지난 시간에 이어 <여기는 서울>에서 전해드립니다.
[책 낭독-김은주] 나는 은덕의 작은 추운 아파트에서 일주일이 다 되도록 혼자서 지내고 있었다. 부모님은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세간이라는 세간은 모조리 팔아버렸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밥상과 농짝 하나가 전부였다. 장판까지 다 뜯어서 내다 파는 바람에 나는 시멘트 바닥에 다 해진 요를 깔고 낡은 외투를 덮고 자야 했다. 전기도 끊겼다. 날은 저물고 어둠이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불을 지펴 방을 덥힌 지 오래됐는데도 추위를 느낄 기력조차 없었다. 쌀 한 톨 입에 넣지 못한 지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굶어 죽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유서를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11살이었다.
관객들 앞에서 자신이 쓴 책의 일부를 낭독하는 김은주 씨의 목소리가 떨립니다.
가슴 아픈 경험을 다시 한번 끄집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데요. 그래도 용기를 냈습니다.
평범하게 살던 은주 씨의 일상을 흔든 것은 기근이었습니다. 아버지까지 앗아간 고난의 행군. 식량을 구하러 떠난 엄마와 언니를 기다리다 유서를 썼다는 11살의 은주 씨 이야기는 혼자만의 것이 아닐 겁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은주 씨의 책은 당시를 살아낸 많은 소녀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김은주] 한 여섯째 되는 날 유서를 쓰고 누워 있었는데 참 민망하게 그날 엄마가 돌아왔어요. 제가 쓴 유서를 가만히 읽으시고 하셨던 첫 마디가 ‘다 같이 죽자’였어요. 엄마가 빈 손으로 돌아오신 거예요. 그래서 셋이 같이 누웠어요. 저는 행복했어요. 엄마가 날 버린 게 아니구나 어차피 죽을 거였는데 엄마랑 같이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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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함께 죽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는 11살의 은주 씨. 밤을 무사히 넘긴 엄마는 다음 날 아침, 집안에 남아 있던 초상화 틀까지 모두 팔아서 먹을 것을 사 먹었고 세 사람은 그때부터 꽃제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농장 밭에서 옥수수와 감자를 훔쳐 먹었고 훔치다가 걸리면 매를 맞기도 했지만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그나마 버틸 만했습니다.
[김은주] 그렇게 해서 꽃제비 생활을 1년 하다가 겨울이 되었어요. 산에 가서 나물을 해올 것도 없고 밭에 가서 훔쳐 먹을 것도 없고 이제 굶어 죽을 일만 진짜 남은 거예요. 그때 엄마가 중국에 가면 ‘사탕 과자는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단다’. 그 말인즉슨 ‘중국에 가면 적어도 굶어 죽은 일은 없단다’로 들은 거죠. 엄마가 ‘여기서 굶어 죽을 바에는 두만강을 건너다 총에 맞아 죽자’고 하셔서 저희는 엄마를 따라서 탈북을 했습니다.
세 사람 모두 무사히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도착했지만 살기 위해 간 그곳에서 가슴 아픈 일을 겪게 되는데요. 은주 씨는 차마 책에 담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김은주] 제가 이 책을 2012년에 썼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이 얘기를 못 했어요. 책에도 담지 못했고요. 왜냐하면 입 밖으로 꺼내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리고 저의 경험이 아니었기 때문에 말을 못 했는데, 저희가 두만강을 건넌 첫날, 밤이 돼서 그냥 중국 도로를 따라서 걸었어요.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니까. 어느 순간 뒤에서 불을 켜고 차가 한 대가 달려오는 거예요. 처음이었어요. 숨어야 하나? 도움을 요청해야 되나? 아니면 그냥 중국인인 것처럼 걸어가야 되나? 그 짧은 순간에 상의할 시간은 없고… 어떻게 해야 되나 생각을 채 마치기 전에 자동차는 우리 옆에 와서 속도를 줄이는 거예요. 어, 왜지? 하는데 저희 언니를 잡아서 차 안으로 끌어가요.
너무도 순식간이었습니다. 은주 씨가 언니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달리는 차를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들려주는 은주 씨의 목소리도 심하게 떨리기 시작합니다.
[김은주] 언니가 14살이었거든요. 만 14살. 제가 만 12살이었는데 중국인들이 저보고 7살이냐 8살이냐고 물어봤었어요. 언니도 그래 봤자 10살 정도로 보이는 그야말로 아이였는데 차에서 몹쓸 짓을 당하고 그냥 길거리에 버려졌어요. 근데 이게 제 경험이 아니다 보니까 저희는 지금까지도, 20년이 넘게 흐른 지금까지도 그날 그 일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어요. 엄마랑 언니랑 모두. 그래서 저도 차마 언니한테 얘기할 수 없어서 책에도 싣지 못했는데 작년에 유엔 인권 차원에서 탈북 여성의 인권 특히 국경에서 탈북 여성들의 인권 실태에 대해서 제가 증언할 기회가 있었고 그래도 누군가는 얘기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많은 탈북민들이 너무 아프고 그걸 얘기하는 순간 자기가 더 못나 보여서 말을 못 해요. 그래서 제가 용기 내서 언니한테 물어봤어요. 얘기해도 될까?
은주 씨 언니의 대답은 ‘난 괜찮아’ 였답니다. 언니가 평생 감추고 싶었던 이야기의 공개를 허락한 이유는 다른 탈북 여성들이 같은 일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언니를 다시 찾은 은주 씨와 엄마는 말없이 다시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중국 여성을 만났는데 도와줄 것처럼 접근해 놓고 은주 씨 가족을 2천 위안에 중국인 남자에게 팔았습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중국에서의 삶은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가 중국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지 1년이 되던 어느 날, 은주 씨와 엄마, 언니 모두가 북송되었고 수감생활을 하며 강제노동에 시달렸습니다. 2개월 만에 다시 탈북했지만 중국에서는 같은 생활을 반복하며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김은주] 중국에서 오래 살면서 한국에 가고 싶어졌어요. 한국 드라마, 영화 이런 걸 보면서 ‘대한민국이 잘 사는 곳이구나’ 했죠. 그리고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으로 시집을 가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조선족이면 참 좋겠다. 시집이라도 남한으로 가게’ 그랬었는데 지인을 통해서 대한민국으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브로커와 연결되고 3일 만에 출발을 했습니다.
3일 만에 떠났지만 몽골 사막을 거쳐 4개월이 걸려 한국에 올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은주 씨는 제3국에서 떠도는 탈북 여성들의 비참한 삶을 마주하고 한 탈북 남성의 죽음도 지켜봐야 했습니다.
두 번의 탈북 후 어렵게 몽골까지 왔지만 북송 후 겪었던 모진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그토록 원하던 한국 땅은 밟아보지 못하고 몽골 땅에 묻혔다는 말을 전하며 은주 씨는 다시 한번 목이 메는데요.
-Closing Music-
[김은주] 그분이 고향 땅에는 못 묻히더라도 정말 그분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내가 있는 한국으로 시신 가루를 가져가면 안 되겠느냐고 수용소에 있던 분들이 그렇게 애원을 했는데 이게 국제법상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분 같은 경우는 고향도 아니고, 그렇게 원했던 대한민국도 아니고 그냥 몽골 땅에 지금도 남아 계시거든요. 어쩌면 여러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누리는 자유이겠지만 많은 탈북민들 또 북한 주민들에게는 목숨을 걸어도 가질 수 없는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90년 중후반이면 벌써 20년이 지난 고난의 행군. 그 시기를 헤쳐 나온 소녀의 이야기를 한국의 관객들은 어떻게 들었을까요. 남은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여기는 서울>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현주,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