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과 김정일과의 권력갈등

장진성∙탈북 작가
2014.08.12
kims_college_film-305.jpg 북한의 조선중앙TV가 방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일대기를 그린 기록영화 '누리에 빛나는 선군태양'의 제1부 '조선을 빛내이리'에 소개된 김 위원장의 유아기때부터 20대까지 사진들. 군부대시찰 수행때 '포마드머리'에 말쑥한 양복차림의 김정일.
사진-연합뉴스 제공

오늘 이 시간에는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김일성, 김정일 권력갈등에 대해 말씀 드리 겠습니다. 부자간에도 권력은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 김일성에 대한 김정일의 반감은 당시 자살소문이 무성했던 생모 김정숙의 사망 충격에 의한 동심의 굴곡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인이 사망 한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은 남침전쟁을 일으킵니다. 그 동란을 피해 김정일은 아버지와 헤어져 3년의 피난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양으로 돌아왔지만 집안은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1954년 이복동생인 김평일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인 김성애는 아버지 곁에 늘 붙어 다니던 여비서 출신이었습니다. 김정일은 1964년 김일성 종합 대학을 졸업했는데 하필이면 그 한 해전인 1963년 김일성은 김성애와 공식 결혼을 해버립니다. 그 통에 수령의 부인이 된 김성애의 정치적 지위도 급부상하게 됩니다.

잇달아 1966년 중국에서 모택동 부인인 강청이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면서 북한 내에서도 그 영향을 받아 김성애가 권력 정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때의 북한 권력층은 김성애의 조언에 더 귀를 기울이던 상황인데다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까지 가세하여 반대하는 바람에 김정일은 내각이나 조직지도부와 같은 핵심부서가 아닌 당선전선동부 지도원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전 부 직위를 이용하여 김일성 신격화와 빨치산 출신 권력가들의 항일역사왜곡 선동으로 분위기를 역전시킵니다. 월간잡지 "항일무장투쟁 참가자들의 회상 기"가 출판되고 김일성과 항일투사들의 동상도 그때부터 하나 둘 세워졌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북한의 절대 신이 아니었습니다.

1968년 말에는 민족보위상(국방장관)이던 김창봉의 주도로 무장 쿠데타가 벌어질뻔한 직전의 상황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김일성은 1969년 1월 김창봉과 그 반란세력을 숙청하는 조선인민군당위원회 제4기 4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최현 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합니다. 최현은 그 보답으로 수령절대주의와 장남 세습의 민족 전통성을 주장했고, 그 덕에 김정일은 1969년 여름에 열린 비공개 당 확대회의에서 비로소 당 조직 부 과장 직을 얻게 됩니다.

김정일은 그때부터 대학 졸업을 앞 둔 젊은 젊은이들로 구성된 홍위병식 3대혁명소조를 전국에 조직하고 그 주된 활동을 지방관료들의 부정부패에 초점을 맞춥니다. 3대혁명소조로 지방권력 비리와 연계된 중앙 간부들을 하나 둘 제거하면서 김정일의 권력은 점점 커져 1973년 당 조직 부 부장 겸 3대혁명소조 총책임자로 됩니다, 김정일은 주체철학을 내세워 김일성 주의로 1973년부터 당 절대주의 정치를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김일성은 내각정치를 했고, 그 탓에 대부분 최 측근들이 내각에 분포돼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북한 노동당이란 구 소련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지역당 수준이어서 전후 인민경제 복구 권한을 가진 내각의 지위가 더 높았던 것입니다. 사회안전성 소속이던 정치감찰조직을 국가보위 부로 독립시켜 당 조직지도부 직속에 둔 것도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김정일은 온 사회의 김일성 주의 실현은 조직력과 선전이 필수라며 당 조직 부와 당 선전 부를 급 부상시킵니다. 때마침 1976년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의 주범인 강청이 구금되면서 김정일의 당 제일주의 노선은 더더욱 탄력을 받아 북한은 졸지에 당적 영도에만 의존하는 절름발이 국가가 돼 버립니다.

아버지가 효도만한 충성이 없다고 착각하는 사이 아들은 카세트 보고서를 시작으로 유일 비준시스템을 구축하게 됩니다. 하여 1980년 초반에는 김일성 종합 대학 동창생들로 구성된 당 조직지도부 안에 인사권, 당 생활지도권, 검열 권, 수령경호 권, 제의서 종합 권을 가진 사실상의 김정일 유일지도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1981년에는 빨치산 출신 자녀들을 아예 중앙당에 받지 말도록 당 조직지도부 내부 인사원칙까지 만들게 됩니다.

그때부터 동지를 잃은 김일성은 권력도 잃어 말년에 인민에게 보여지는 대외 성 현지시찰과 외교권력 밖에 가질 수 없게 됩니다. 그마저도 수령 경호 권을 가진 당 조직지도부에 꽉 막혀 근접경호가 아닌 근접감시 상황에서 가능한 권력이었습니다. 북한이 1980년 10월에 열렸던 6차 당 대회 이후 2004년까지 20년 넘게 단 한 번도 당 대회가 열리지 않은 것도 김정일이 김일성의 당 총 비서 권력인 정치국회의 소집 권한 자체를 무력화시킨 결과 당 총 비서 권력이 공황상태에 빠져서였습니다.

그때부터 북한의 권력구조는 아버지가 명예직이고 아들이 실권이듯 공식지위의 순리보다 김정일의 신임도에 따라 대내적 권력이 인정되는 이중구조로 고착됐습니다. 즉 아버지 세대의 고령의 인물들에게는 명예직의 공개직함을 주고, 인사권이나 정책결정과 같은 대내실권은 김정일의 동창생들에게 집중됩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사망하고 나서 뜬금없이 “혁명1세들에 대한 존경은 공산주의자들의 숭고한 도덕”이라는 논문을 노동신문을 통해 세상에 발표한 것도 바로 김일성과 그 동지들인 혁명1세대들과의 권력투쟁에서 얻은 권력찬탈의 위선을 감추기 위해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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