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자유를 찾은 탈북자 그레이스 김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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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김 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그로서리 가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레이스 김 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그로서리 가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 그레이스 김

미국에 와서야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찾은 탈북자가 있다. 바로 그레이스 김 씨다. 그는 40대에 미국 난민으로 들어와 진정한 자유라는 걸 찾았고, 이제는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여성 사업가로서의 변모된 삶을 살고 있다. 현재 그레이스 김씨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시에서 2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버지니아 수도 리치먼드에서 아담한 그로서리 (식품점과 식당)를 운영하고 있다. 김 씨는 2007년에 미국에 와 2012년에 미국 시민권자가 돼 딸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레이스 김씨는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고향의 부모님을 생각하며 양로원을 운영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미국서 자유와 행복을 찾은 탈북인 그레이스 김씨와 함께한다.

그레이스 김씨는 함경북도가 고향이다.

그레이스 김: 저는 함경북도에서 살았어요. 고생하면서 살다 결국에는 자유를 찾아 중국에 넘어왔지요. 돈을 좀 벌어 가자는 거지요.

김 씨가 북한에서 살았던 이야기 들어보자!

그레이스 김: 2007년에 미국에 왔어요. 북한에서 삶이라는 것은 북한은 아직도 공산주의이니까는 내가 아무리 일해도 체계가 있어요. 얼마를 가져가고 못 가져가고 월급쟁이이니까? 여기 돈으로 한 달에 20달러 그 정도 가져가는데 그걸 가져가면 일반 주민이 살아가는데 옹근 하루도 못살 때가 있어요. 그래서 북한에서는 장사를 해서 살아야 되는데, 장사하는 게 너무너무 힘든 거예요.

김 씨에게 북한에서 장사하기가 어렵다는데, 얼마나 어려운지 물었다.

그레이스 김: 장사를 하자면 우선 인민보안원이 끼어야 되고, 경찰서가 나와야 되고 너무 단속이 많으니까? 북한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유가 없고, 남보다 더 잘 산다면 비사회주의 그루빠라는 것이 있어요. 그럼 비사회주의 그룹빠에 걸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북한에서는 어떻든지 자유가 없고 내가 얼마든지 노력하면 노력할 수 있는데, 하나도 못 가져오는 거지요. 그리고 인민들이 다 골고루 사는 걸 원하는 데 거기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누구를 돕고 싶어해도 비사회주의 그루빠에 걸리기 때문에 이밥을 먹어도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그걸 밥상 밑에 숨겨 놓을 수 밖에 없는 거지요.

김 씨는 40여 년 동안 김씨 왕가 체제에서 깜깜한 눈으로 살았다고 증언한다.

그레이스 김: 북한은 한마디로 말해서 아직은 모든 사람들이 외부 세계를 너무 모르다 보니까? 제가 북한에서 살 때는 그걸 몰랐는데 중국에 딱 넘어오니까? 아 우리가 이때까지 김정일이 체제하에서 김일성이 체제하에서 너무나도 깜깜한 눈으로 이제까지 살았구나! 하며 많이 후회했지만, 그때는 이미 지나간 생활이고.

김 씨는 북한에서 미국은 먹을 것이 없는 거지의 나라로 배웠다고 한다.

그레이스 김: 북한에서 아 때부터 학교 때부터 미국에는 먹을 것이 없고, 남조선도 먹을 것이 없다고 어린아이서 부터 그런 것을 많이 배웠기 때문에, 저는 또 6월 25일 때는 남조선 괴뢰군과 미국과 지배계급을 타도하라! 배웠기 때문에 저는 이때까지도 그렇게 알고 왔지만, 제가 미국땅에 발을 딛어 보니까? 미국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선진국가인 거에요.

그레이스 김 씨는 자유를 찾아주고 또 탈북자를 받아 준 미국에 감사하고 있단다.

그레이스 김: 제가 3개국(북한, 중국, 미국) 을 다녀봐도 미국 만큼 모든분들이 선한분들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에 와서 일을 해 보니까? 미국은 기회의 나라고 부지런히 일하면 잘 사는 게 이게 자본주의로구나! 그래서 저는 미국에 온 걸 너무너무 감사하고 또 미국이 우리 탈북자들을 받아 준 데 대해서 항상 긍지스럽고 자부심을 안고 사는 거지요.

그레이스 김 씨는 미국에 정착해 여성 사업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레이스 김: 저는 여성 사업가는 아니고요. 제가 간단히 그저 미국에 오니까? 아하고 둘이 왔을 때 딸이 16살이었어요. 미국에 처음 오니까? 북한에서 보지 못한 걸 미국에서 너무 많은 것을 며칠 간에 느껴 본 거에요. 그래서 미국은 자유의 나라고 선진국가인 만큼 내가 얼마나 부지런해 이땅에서 살아야 되는 걸 그때 느꼈어요.

그레이스 김 씨가 미국에서 어떻게 정착의 길을 걸었을까?

그레이스 김: 저는 미국에 와서 딸과 둘이 왔는데 어떻게든 이 사회에서 오직 일어나야 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마루 까는 일, 잔디 깎는 일, 세탁소 일, 식당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보통 그러니까 하루에 자는 시간은 많이 자면 2시간 30분 정도 자다 보니까? 두 달 되니까? 제 목에서 피가 나오더라고요. 제가 그때 생각하니까? 결핵이 왔지 않는가! 몇 달 지나니까? 더 많이 나오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병원을 안 갔어요. 병원 가는 시간에 좀 더 돈 버는데, 살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제가 처음에는 보통 5개 잡(일)을 했다고 봐야 되지요.

그레이스 김 씨는 처음 미국 정착하기까지 하루에 2-3시간 정도 밖에 잠을 잘 수 없었단다.

그레이스 김: 그래서 1년은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영어도 안되니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어떤 때는 전기회사 빌딩 청소했는데 하루 저녁에 8개 층을 청소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지요. 9시쯤이면 배가 고파서 과자도 꺼내 먹고 너무 배가 고프니까? 그래 요기 하면서 일하고요. 그래 제가 2번 자살을 시도했어요. 너무 힘들어서요. 그리고 차도 없으니까? 석 달 만에 800달러짜리 차를 샀어요. 그 800달러 짜리 차를 샀는데 직장에 가다 어떤 때는 이틀 만에 한 번씩 길에 서는 거에요. 10달 만에 집을 샀다는 김 씨의 이야기 들어보자! 그레이스 김: 제가 어떤 때는 밥 시간도 아까워서 솔직히 화장실을 보면서 빵 같은 것 먹고, 거의 10달 되니까? 제 손에 한 3만 달러가 쥐어지더라고요. 정말 저는 그때까지는 10달러 이상의 옷을 못 사 입었어요. 그래 10달 되니까? 돈이 돼서 어느 날 한인 부동산 매매 일하시는 분이 계세요. 그분을 찾아가서 집을 하나 사야겠는데 이야기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거에요. 어떻게 해서 집을 사느냐! 그래 10달 만에 이 집을 산 거에요. 방이 4개이고, 화장실이 3개 반 되는 집이에요.

그레이스 김 씨가 자신의 집에 각종 야채를 심어 먹는단다.

그레이스 김: 아무래도 땅이 조금 있으니까? 심어 먹지요. 미국에 오니까? 이 넓은 땅에 심어 먹지 않더라고요. 심는 자체를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날 제가 텃밭을 가꾸고 있으니까? 미국분이 와서 여기다 뭘 하려느냐고 물어요. 여기다 고추도 심고, 먹는 야채도 심는다고 하니 어떻게 심느냐고 물어요.그래서 제가 그때 생각하기에 미국분들이 너무 선하니까? 너무 잘사는 나라고, 집에서 농사짓는 자체를 모르더라고요. 북한분들도 다 그렇지만, 제가 우리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거에요. 우리 아버지가 이런 땅을 너무 좋아하는 데 이땅에 심으면 아무리 못해도 한달 먹은 것은 몰라도 보름 동안 먹을 것은 나오겠는데 그래서 집들마다 잔디를 심고 잔디에 물을 주는 게 너무 아까운 거에요. 우리 북한분들 같아서는 잔디를 다 걷어내고 거기다가 무언가 심어야겠는데 하는 생각을 해봐요. 그러나 이곳에 사는 미국분들의 사는 방식이 다르니까요. 그러나 북한사람들을 항상 생각하고 있지요.

운영하는 가계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그레이스 김: 제가 큰 가계는 아니고 작게 생선 가게를 했어요. 생선 가계는 여름에는 괜찮은데 겨울에는 너무 매상이 떨어지더라고요. 그래 맥주와 담배를 판매하고 또 칩 같은 것도 넣고 지금은 중국 식당까지 하다 보니까? 가게는 작지만 아담한 슈퍼 가게가 된 거지요.

그레이스 김 씨에게 따님 자랑해 달라고 했다.

그레이스 김: 직장을 가자고 보니까? 차도 없고 40대 넘어서 미국에 오니까? 일단 영어도 안 되고 딸과 둘이 사는 게 너무너무 힘들다는 정도가 아니었어요. 딸을 학교에 보냈는데 학교를 이틀 갔다 영어 못해서 학교 안 가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엄마로서 조언을 몇 차례 했더니 그다음에 마음이 돌아서서 학교도 갔고 현재 대학 4학년에 다니고 있지만, 우리 딸은요 미국와서 자랑도 있지만 지금 너무나도 감사한 거에요. 지금은 미국학교생활 잘하고 익숙 하자니까? 도서관에 가서 정말 부지런히 공부하고, 집에 오면 저의 친절한 영어 선생이에요. 그래서 저는 딸에게서 영어를 많이 배웠지만, 제가 하는 사업도 많이 도와서 여기까지 왔서요.

그레이스 김 씨는 자신이 탈북자이기 때문에 탈북자가 힘들다는 이야기 나오면 돕고 싶단다.

그레이스 김: 저는 지금 현재까지도 남의 방조를 받아 본 적이 없어요. 저는 제힘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절약하느라고 아직 의료보험도 없어요. 탈북자가 힘들다면 응당히 도와준다고 생각하지요. 탈북자를 돕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제가 일단 탈북자이고 제가 그 길을 걸어 봤고 그 고생을 제가 해 봤기 때문에 저는 자다가도 일어나서 탈북자가 힘들다면…

그레이스 김 씨는 앞으로 양로원을 운영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레이스 김: 지금까지도 열심히 사노라 했지만,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서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꼭 제가 양로원을 하고 싶어요. 왜냐면 제가 북한에서 고생하면 살았기 때문에 여기 미국 어르신 들이나 한국어르신이나 저희 가게에 오시는 분들도 많으셔요. 양로원에 계시는 분들도 드문 드문 오셔요. 어느 부모든 내 부모라고 생각해서요.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미국서 자유와 행복을 찾은 탈북인 그레이스 김 씨와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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