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캐나다의 한인교회들이 주축이 돼서 식민지 조선에 최초로 파견되었던 캐나다 선교사 윌리엄 맥켄지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 시간에는 윌리엄 맥켄지 선교사의 생애와 그의 조선에서의 활동의 의미 전해드립니다.
지금으로부터 백여년전, 캐나다 교회들은 당시 식민지 조선에 200여명의 기독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캐나다는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의 근대 발전에 기여한 나라들 중의 하나인데요. 당시 높은 고등교육을 받은 캐나다 선교사들이 들여간 의료와 교육은 우리나라 초기 근대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국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이 주로 남한에서 활동했다면 캐나다 선교사들은 상대적으로 오지가 많고 험준한 지역인 함경남북도와 강원도를 선교지로 삼고 활동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북한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선교사를 앞세워 북한을 침략하려고 하고 있고,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한 수많은 선교사들도 제국주의 앞잡이로써 조선의 침략의 길잡이었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캐나다나 미국에서 정부와 교회는 서로 다른 조직이며 종교에 있어서 교회는 정부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맥켄지 선교사가 조선이라는 미지의 땅을 알게 된 것은 1891년 신학교를 갓 졸업하고 한 장로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담임목사로 일을 시작하게 된 때였습니다. 그의 간증에 의하면 이때 그는 강력한 성령의 음성을 듣고 조선으로 선교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캐나다 장로 교단이 동남아 선교를 주로 후원하기 때문에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안 맥켄지 선교사는 개인적으로 캐나다 교인들의 후원을 모아 조선에 가서 생활 하는 선교사 비용을 마련하게 됩니다.
1893년 캐나다를 떠나 길고 긴 여행끝에 조선에 도착한 그는 조선말을 배우고 선교지로 탐색하던 중 한 조선인 형제가 자신들의 힘으로 개척한 황해도 대구면에 있는 한 교회의 초대 목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그는 이곳에서 조선사람들의 의복과 음식 등 조선사람들의 생활방식대로 생활하게 되는데요. 영국 스코틀랜드 태생인 그는 조선사람의 짚신을 신고 한국문화와 풍습을 익히면서 철저히 한국사람으로 살았갔습니다.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는 동학군들을 찾아가 치료해주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해 조선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땐 구한 말기라서 세상이 더없이 험악했음에도 불구하고 황해도 교인들은 그의 사랑의 실천으로 그를 믿고 따랐고 교회는 더욱더 확장되어 갔습니다.
하지만 맥켄지 선교사는 부실한 음식물로 인한 영양결핍과 풍토병에 걸려 신음하던 중 조선에 온지 1년이 좀 지나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30세도 안된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맥켄지 선교사는 자신에게 남아있던 모든 재산을 교인들에게 나눠주었고 그의 열정적인 헌신으로 조선의 교회가 부흥된 것을 본 캐나다 교회에서는 다시 더 많은 선교사를 모집하여 조선에 보내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후 2백여명이나 되는 캐나다 선교사들이 지금의 북한지역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에 파견된 캐나다 선교사들은 원산, 성진, 함흥 그리고 북간도 등에 수십개의 교회를 세우고 여러 학교를 세웠으며 수천 명 조선사람들에게 복음의 믿음을 갖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캐나다의 한인교회들은 한국의 첫 캐나다 선교사였던 맥켄지에 대해 오랫동안 빚진 마음을 갖게 되었다면서 수년전부터 맥켄지 선교사를 기리는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있었는데요. 마침내 지난 10월 초, 캐나다의 동쪽 끝 핼리팩스에 자리한 핼리팩스 교회에서 존 맥켄지 선교사의 동판제막식과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지금까지 캐나다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장소연입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