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참 행복을 만들어가는 네델란드의 탈북민 영어선생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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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관심이 높아가는 북한의 인권문제와 그 활동소식을 전하는 캐나다는 지금, 캐나다 토론토에서 전합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탈북민 출신 영어 선생님하면 언뜻 상상이 가시나요?

그것도 남한이 아닌 유럽의 남부에 자리한 네델란드라는 나라에서 네델란드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탈북민 말입니다. 네델란드는 북한에서 화란이라고 부르죠.

대량탈북의 역사가 시작된지 어언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 북한을 탈출한 탈북민들은 이곳 캐나다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는데요.

오늘은 혈혈 단신으로 북한을 떠나 지금은 유럽의 네델란드에서 세 아이의 아빠가 되어 열심히 행복을 만들어가고 있는 한 탈북민 영어선생님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탈북민 최요셉씨가 북한을 떠난 것은 1998년 북한의 대량아사와 함께 대량탈북이 한창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최요셉] 생존을 위해서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어서 어느날 갑자기 중국으로 가보고 싶다는 호기심에 가게 되었고 또 (국경을)넘는 과정에도 당시 98년도에는 경비가 심하지 않았기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었습니다. 운좋게도 당시 2월달이어서 강이 얼었기때문에 두만강 위를 걸어서 중국으로 갔습니다.

요셉씨의 가정은 그가 2살때에 곡창지대인 황해도에서 두만강을 접한 국경지대인 함경북도 무산으로 추방당했습니다. 요셉씨의 할아버지가 땅을 좀 소유했던 지주라는 이유였습니다.

요셉씨는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아버지와 함께 산에 나무를 해다 식량을 구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자 결국 중국으로 가보자 하고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첫 걸음은 막막 그자체였습니다.

[최요셉] 어둠속에서 길을 따라 걷고 또 걷다가 배고프고 춥고 하니까 보이는 집에서 음식을 달라고 구걸하고 이렇게 하면서 이렇게 살다가 일자리를 찾아보고 일을 하게 된거죠. 아무래도 중국에서 살다 보니까 중국말도 자연히 익히게 되고 일을 하니까 또 어느정도 돈도 받게 되고 그렇게 되니까 먹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혼자서 이곳 저곳 떠돌아 다니면서 살던 요셉씨에게 그를 가족같이 돌봐주는 중국인 양부모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보살핌속에서 그는 더는 먹을 것과 잠자리를 걱정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후 삶은 그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지게 했는데요.

[최요셉] 중국인 양부모님들 밑에서 자랐기때문에 그분들이 제가 필요한 여러가지를 다 해주셨고 어느날 갑자기 양부모님들이 저한테 너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장가를 가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여자사진을 보여주는 데 그걸 보니까 참 슬픈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발급받은 신분증이라고 볼수 있겠는데요. 거기에 보면 사진은 제 사진인데 저의 나이 이름 성을 다 바꾸었지요. 다 중국이름으로, 양아버지 성으로 바꾸고, 출생지도 다 바꾸고 그래서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내가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면 내 와이프와 내 아이들에게도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을 못한다는 그게 갑자기 떠오르면서 굉장히 슬펐습니다.

요셉씨한테 당시 분명한 것은 나는 중국인은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최요셉] 내가 이북에서 나올때는 먹을 것이 없어 나왔는데 이제 와서 보니까 내 자신에게 질문을 하게 되드라구요. 그러면서 갑자기 북한에 있는 가족이 보고싶고 그러면서 아 이것은 아니다라고 결심을 하게 되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북으로는 돌아갈수 없는 길이고 이북에 돌아가면 처벌을 받을것이 분명했고 그래서 결정한 것이 대한민국으로 가자 라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요셉씨가 자신에게 던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그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탈북민 요셉씨의 새 세상을 향한 인생의 여정 다음시간에도 이어집니다.

지금까지 캐나다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장소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