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동북공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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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동북공정 첫 순서에서는 중국 동북공정의 주장을 개괄적으로 알아봤고, 또 동북공정을 전후한 주요사선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오늘 순서에서는 동북공정 논란의 핵심인 고구려사가 중국의 역사라는 동북공정 학자들의 주장과 그에 대한 한국학자 서길수 서경대학교 교수의 반론을 알아봅니다.

서길수 교수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1990년부터 94년까지 중국 동북지역의 고구려 산성 무려 백30여 곳을 답사하며 고구려 유적 자료를 수집해 왔으며 94년 6월 고구려연구소를 세웠습니다. 그는 한국내의 고대사 관련 학자들과 중국 일본 대만 러시아등의 여러 학자들을 자문위원으로 삼아 96년 연구소를 연구회로 개칭하고 연구회 회장과 이사장을 역임하며 지난 12년간 50차례가 넘게 고구려에 관한 국내,외 학술회의를 열었습니다. 특히 2003년부터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학술회의를 개최하면서 고구려사 지키기에 앞장서고 있는 고구려 전문가입니다.

고구려사와 관련해 동북공정이 내 놓은 주요 책자로 ‘고대중국 고구려역사 총론’과 ‘고대중국 고구려역사 속론’ 두개가 있습니다. 서길수 교수는 이 책들에서 고구려사가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는 논리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주장1: 고구려가 중국땅에 세워졌다?

그 하나는 고구려가 중국땅에 세워졌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구려는 국가가 아니라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이었다는 것,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고구려인들은 대부분이 중국에 들어가 중국에 귀속됐다는 주장을 또 다른 하나로 꼽았습니다.

먼저 "고구려가 중국땅에 세워졌다"는 중국 동북공정의 주장을 알아봅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고구려는 중국의 한나라 현토군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현토군은 한나라가 기원전 108년, 그러니까 고구려가 세워지기 31년전에 지금의 요녕성 요동반도 북서쪽에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설치한 네 곳의 행정구역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중국 땅이었던 현토군에서 고구려가 세워졌으니 고구려사가 중국의 역사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서길수 교수는 그 같은 주장은 역사적인 사실로 볼 때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서길수: 고구려가 현토에 세워졌다는 기록은 없다. 고구려는 부여땅에 세워졌다. 현토는 약한 군이었고 부여에 밀려 현재의 심양까지 후퇴했다. 고구려가 건국할 당시의 땅은 이미 중국땅이 아니었다.

여기서 잠시 부여라는 나라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한민족 역사서에 따르면 부여는 고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08년보다 120여년 앞서 지금의 북만주에서 일어나 현재의 길림성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융성했던 나라인데, 기원후 494년 멸망할 때까지 약 700년을 존속했던 초기 국가들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부여 지배세력중의 일부가 갈라져 나와 동부여를 세우고, 또 동부여의 지배세력중의 주몽계열이 기원전 37년, 그러니까 부여보다 200여년 뒤에 다시 압록강 방면에 진출해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여족은 바로 조선민족의 조상이며 부여는 조선민족의 땅이란 말입니다.

주장2: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권?

그 다음 중국 동북공정의 주장인, "고구려는 독립 국가가 아니라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이었다"는 논리를 알아봅니다. 중국학자들은 한나라때에는 고구려가 속박통치됐고 위진 남북조 시기에는 고구려가 신하로서 공물을 바쳤고 그 이후 중원 왕조인 수나라와 당나라는 고구려를 직접 관할하려 했으며 급기야 당나라 태종 때에 와서는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중원 통일이라는 주장입니다. 한마디로 고구려는 705년 존속하는 기간 동안 계속 중원왕조에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아 신하로서 활동한 중국의 지방정권이었지 독립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원왕조란 중국대륙의 심장부인 하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화북평원에 자리 잡았던 중국 한족의 중앙 왕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중국 지방 제후국이나 왕국이 아니라 중국의 정통 왕조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서 교수는 고구려 왕국의 존속 기간 동안 수십 개의 작고 큰, 서로 다른 민족이 이합 집산해 지배했던 중국이, 고구려를 지방정권으로 본다는 것은 우스꽝스런 논리라고 비판합니다.

서길수: 고구려는 705년 계속되는 동안 중국은 서른 다섯 개 나라가 바뀌었다. 그것도 절반은 한족이 아니라 북방민족들이고, 그리고 이 나라들의 70퍼센트는 50년도 못가서 망한 나라들이다. 어떻게 그런 나라들의 지방정권이 될 수 있겠나. 지금에 비유해 말하면 전라도나 경상도 지사는 705년이나 갔는데 그것을 임명한 대통령은 서른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는 것인데 말이나 되는가.

거기다, 중국은 당초부터 중국역사에 고구려를 본기, 즉 정사로 기록한 적이 없다는 것이 서 교수의 설명입니다.

서길수: 고구려는 당당한 국가였다는 다른 증거들이 많다. 삼국사기를 보면 안다. 사기에는 고구려본기 신라본기 백제 본기가 있다. 그러나 중국의 어떤 역사책에도 고구려를 본기로 기록한 것이 없다. ...본기라고 하는 것은 왕의 정사를 기록한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의 변방 나라 정도로 기록했지 중국의 본역사로 기록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즉, 조선의 역사기록인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를 신라와 백제와 함께 조선역사의 정사로서 다루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중국의 정사로 기록하지 않았으니 중국 역사가 될 수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서 교수는 또 근래까지 중국은 고구려가 한민족의 역사라는 점을 부인한 적이 없었다고 덧붙입니다.

서길수: 중국 그 나라 역사책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해동3국’ 동쪽의 세 나라가 있는데 그게 바로 한국의 선조라는 얘기를 1980년까지 인정했고 지금도 역사책에는 고구려가 한국사로 되어있다. 그런데 80년대 이후 갑자기 변화된 것이다.

그밖에도 서 교수는 고구려가 연호를 썼다는 데에서도 중국의 지방정권이 될 수가 없는 근거로 내세웁니다. 연호라는 것은 한 왕국의 임금이 자리에 오른 해에 짓는 칭호인데 중원의 각 왕조는 천제지자, 즉,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천자 연호를 사용하였지만 주변나라들에 대해서는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못하게 하고 중원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강요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같은 중원왕조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으로 연호를 썼다면 그 나라는 지방정권이 아닌 독립국가라는 것입니다.

주장3: 고구려가 망한 뒤 고구려인들은 대부분 중국으로 갔다?

그럼 세 번째 동북공정의 주장, 즉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고구려인들은 대부분이 중국에 들어가 중국에 귀속됐기 때문에 고구려가 중국 역사" 라는 주장을 살펴봅니다.

중국민족사에 따르면 고구려가 가장 번성했을 때의 인구는 가구 15만호, 가구당 다섯 명의 식구로 계산하면 70만여명 가량. 고구려 멸망 뒤 이들이 이주한 지역별로 보면 절반에 가까운 30만이 중국 중원으로 이주, 그리고 신라에 들어간 사람 10만, 말갈- 즉 발해로 유입된 사람 10만, 돌궐(-6세기 중엽부터 2백년간 몽골고원과 중앙아시아에 걸친 지역을 지배한 터키계 유목민족)로 1만, 해서 약 50만명이고, 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10만, 요동같은 현지에 흩어진 유민 10만을 합치면 약 70만명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 민족으로 융합된 인구는 불과 10만정도에 그치고 나머지 다수는 모두 한족이 되었으므로 고구려인은 중국민족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논리입니다.

이에 대해서 서 교수는 중국 당나라의 역사서인 구당서의 사료를 이용해 그 같은 논리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구당서의 ‘고려’전에 따르면, -여기서 고려라는 것은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고구려를 고려라고도 불렀습니다. - 이 ‘고려’전에 따르면, 고구려의 인구는 69만 7천호로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중국민족사에서 주장한 고구려 인구 15만호가 아닌 구당서의 69만호 가구를 한 가족당 5명으로 쳐서 계산하면 고구려 인구는 345만명이라는 숫자가 나온다는 겁니다.

고구려 멸망과 함께 여기서 중국으로 건너간 30만명을 빼면 남는 고구려 인들은 적어도 300만명은 된다는 것입니다. 서 교수는 이들 300만명의 고구려인들이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하는 의문에 대해 간단한 답을 제시합니다. 모두 고구려의 옛 땅에 남아있었고 나중에 발해가 건국되자 모두 발해인이 됐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장은 결국 발해가 고구려를 이었다는 근거의 하나가 됩니다.

기획보도 동북공정, 다음 순서에서는 발해사가 중국역사라는 중국의 동북공정 주장과 이에 대한 한국 학자의 반론을 알아봅니다.

워싱턴-전수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