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KGB와 공작원들 (4)

워싱턴-한덕인 hand@rfa.org
202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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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KGB 공작원이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전 KGB 공작원이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AP Photo

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교수님, 지난 시간에 캠브리지 5인조와 소련 간첩들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소련 공작원들은 독일에 많은 투자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쇼 독일에서 거의 성공이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1930년대 소련은 파쇼 독일에서 첩보활동을 했을 때 얻은 게 아예 없다고 할 수 있나요?

란코프: 물론 약간 과장입니다. 예를 들면 1930년대 초부터 소련 군사정찰국은 슈토베라는 여성기자를 포섭했습니다. 슈토베는 우리가 언급한 다른 공산주의자들처럼 공산주의를 굳게 믿었고, 특히 히틀러 독재에 대해서 증오감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녀는 사상이 비슷한 사람들과 관계도 있었고, 그녀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과도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중급 외교관까지 있었습니다. 그들은 벌써 41년 봄부터 독일이 멀지 않은 미래에 소련을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를 모스크바로 거의 매일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정보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기자: 소련은 파쇼독일에서 기밀정보를 얻은 게 있는데, 왜 의미가 없었나요?

란코프: 문제는 분석입니다. 정보활동을 할 때 공작원이나 그들이 포섭한 사람들이 비밀자료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료분석도 매우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분석결과는 정치지도자에게 보고되는데, 정치지도자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정치 지도자는 정보당국의 보고서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소련 지도자 스탈린은 독일이 곧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는 보고를 많이 받았지만, 모두 무시해 버렸습니다. 사실상 듣기도 싫어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몇 년동안 시간이 있고, 소련이 몇 년 후에야 유럽에서 시작한 전쟁에 참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목적을 많이 달성하기 위해서 개인 외교를 많이 하고, 정보기관의 보고서보다 자신의 외교 능력을 대단히 믿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민주국가에서도 가능하지만, 한사람이 모든 것을 움직이는 독재국가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습니다. 여기에서 제일 대표적인 사례는 소련역사에서 제일 유명한 공작원 조르게입니다.


기자: 조르게라면 매우 유명한 사람인데요. 북한 청취자들도 그 이름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활동한 스파이가 아닌가요?

란코프: 네 그렇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원래 독일인이었습니다. 조르게는 러시아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독일인, 어머니는 러시아인 이였습니다. 독일어를 모국어처럼 했고, 어린 시절때부터 가족과 같이 독일에서 살았습니다. 당연히 학생 시절부터 공산주의를 굳게 믿고, 당시 독일공산당 창시자와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는 1920년대 말부터 소련에서 얼마 동안 훈련을 받다가 첩보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30년대 초 몇 년 동안 중국에서 공작활동을 했는데, 그 다음에 일본으로 갔습니다. 어떤 자료는 그가 기자로 위장했다고 하는데, 약간 복잡합니다. 조르게는 먼저 소련 공작원으로 독일로 갔습니다. 그 다음에 파쇼독일에서 파쇼사상을 열심히 믿는 사람으로 위장했습니다. 그 때문에 능력도 많고 글을 잘 쓰고 지식이 넓은 사람으로 박사학위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파쇼독일 신문에서 특파원이 되어서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기자였지만, 독일대사관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맺고 외교관만 볼 수 있는 기밀정보를 거의 자유롭게 봤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을 많이 포섭했습니다. 그는 고급정치인, 일본 귀족 출신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는데, 흥미롭게도 그들도 공산주의 사상에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련 정보기관과 협력하였습니다. 심지어 당시 일본 수상의 보좌관은 조르게의 가장 큰 협력자가 되었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조르게는 왜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되었나요?

란코프: 운이 좋고, 분석력도 대단하고, 용감했기 때문입니다. 조르게의 큰 성공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1941년 봄에 독일이 머지 않은 미래에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고, 모스크바로 여러 차례 정보를 보냈습니다. 그는 날짜까지 즉 6월 22일까지 알려주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최근 연구를 보면 약간 과장된 것입니다. 이 만큼 정확한 정보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자신의 외교술을 정찰국 보고서보다 열심히 믿은 스탈린은 이러한 경고를 많이 무시했습니다. 둘째로 조르게는 1941년 가을에 매우 중요한 정보를 모스크바로 보냈습니다. 당시에 일본은 소련을 침공하는 대신에 중국과 동남아, 그리고 미국까지 침략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조르게는 이러한 자료를 얻고, 당연히 모스크바로 전달했습니다. 원래 조르게를 믿지 않았던 스탈린은 이번에 자신의 옛날 잘못을 암묵적으로 인정했고, 이 첩보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 전략의 기본으로 여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때문에 소련정부는 조르게의 첩보를 받지마자, 원동에 있었던 부대를 파쇼독일과 싸우기 위해 서방 쪽으로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조치는 소련이 파쇼독일과 싸우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조르게는 결국 체포되고 처형되었습니다.

기자: 조르게는 소련에 아주 큰 도움을 주었는데요. 소련정부는 그를 애국자로 선포하고 큰 동상을 세웠나요?

란코프: 조금 복잡합니다. 흥미롭게도 일본측은 조르게를 소련에서 체포된 일본 간첩과 교환하려고 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현 단계에서 이 주장이 사실인지 알 수 없습니다. 공개된 자료에서 이 주장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당시에 소련 당국자들의 입장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소련은 당시에 해외에서 첩보활동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1950년대 말까지 소련은 자기 나라가 해외에서 공작원이 아예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어쨌건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그 때문에 소련은 조르게를 모른다고 주장했습니다. 1950년대 말이 되어서야 그를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영웅칭호와 훈장을 주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조르게는 매력이 매우 많은 남자여서 여자친구가 많았습니다. 일본에서도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소련정부는 그녀에게 연금도 지금했습니다. 소련정부는 조르게의 일본인 여자친구를 전사한 소련군대의 미망인으로 인정하고, 그녀가 2000년에 죽을 때까지 연금을 지금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1950년대 말 북한에서 수정주의자들의 우두머리로 묘사하는 후르시초프가 권력을 장악한 다음에야 생긴 일입니다. 오늘날까지 일본에 부임하는 러시아 대사가 하는 전례 중의 하나는 무엇일까요? 조르게의 무덤은 동경에 있는데, 러시아 대사는 정기적으로 조르게의 무덤을 방문해 꽃을 바칩니다.

기자: 러시아 툴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한덕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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