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KGB와 공작원들 (5)

워싱턴-한덕인 hand@rfa.org
2020.01.21
Andrei_Lugovoi_b 전직 KGB 요원 안드레이 루고보이가 모스크바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전화 인터뷰를 하고 있다.
/AP Photo

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교수님, 지난 시간에 소련의 전설적인 스파이 조르게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그는 1941년 가을 결국 일본당국에 체포되었습니다. 하지만 소련 정부는 구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르게가 소련 스파이라는 사실까지 부정했습니다. 당시에 소련 정부는 왜 해외에서 정보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솔직히 말해서 저는 당시에 소련정부가 이러한 이상한 주장을 한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세계역사에서 국가라는 것이 생겼을 때부터, 즉 수천년 전부터 국가들은 첩보활동을 하지 않았을까요? 지난 200-300년동안 대부분 국가는 첩보활동 담당 기관이 있었습니다. 이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소련은 1950년대 말까지 자신들이 이런 활동을 한다는 사실도 부정했습니다. 그 때문에 소련은 위험한 상황에 빠진 공작원들을 소련으로 송환할 수 있었지만, 체포된 공작원들과 소련이 관계가 있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흥미롭게도 소련이 해외 정보활동을 인정한 것은 1950년대 말인데, 이것은 바로 소련 해외첩보활동이 심각한 위기에 빠지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기자: 왜 그럴까요? 소련 첩보기관은 1920-30년대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는데요.

란코프 교수: 1920-30년대는 소련 첩보기관에게 영광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당시에 소련 정보기관의 성공을 가져온 것은 세계, 특히 선진국의 지식인들, 청년학생들 사이에서의 공산주의사상의 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선진국들에서 정치사회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 대다수는 공산주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귀족 출신이든 지주 출신이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다들 공산주의를 열심히 믿었습니다. 한국도 비슷했습니다. 한 기자님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첫 부인 성혜림의 가족 배경을 아십니까?

기자: 유명한 배우 출신인데, 남한 출신이 아닌가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성혜림의 어머니 김원주는 매우 가난한 집 출신인데, 공부를 잘 해서 좋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성혜림의 아버지 성유경은 진짜 돈이 많고 땅이 넓은 대지주의 아들입니다. 그래도 그는 젊은 지식인이 되었고, 공산주의를 굳세게 믿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공산당에 입당하고 1940년대 월북했고 그 후에는 노동당 간부로 지냈습니다. 물론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1950년대 말 북한에서 남한 출신 공산주의자들은 감옥에 많이 갔습니다. 하지만 성혜림의 부모는 살아 남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지주 아들 성유경은 공산주의 사상을 열심히 믿었던 부잣집 출신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1940년대 말-1950년 대 초 들어와 상황이 많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상황이 어떻게 바뀌기 시작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소련에 대한 지식이 많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서양 지식인들은 극좌익 사상에 대해서 관심이 있더라도, 소련을 지상낙원이나 모범적인 국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왜 그럴까요? 그 전에 수십 년간 공산주의 사상은 인기가 많고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까?

란코프 교수: 핵심 이유는 당연히 소련에서의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입니다. 소련에서 스탈린을 비판했을 때, 스탈린 시대의 대규모 테러와 무죄인 사람들에 대한 고문, 학살 등이 많이 노출되었습니다. 원래도 이러한 소문이 없지 않았는데, 공산주의를 믿던 지식인들은 이것이 보수파의 반공 선전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와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이것이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확인했고, 선진국의 공산주의자들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은 유일한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소련은 어느 정도 개방정책을 했고, 외국 방문객은 소련과 공산주의 국가들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외국 방문객들은 소련에 와서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요?

기자: 글쎄요. 소련은 폐쇄국가니까 외국 사람들에게 소련당국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란코프 교수: 1950년대까지 정말 그랬습니다. 당시에 소련으로 가기는 비싸고 어려웠습니다. 또 소련 당국자들은 방문객들을 엄격히 감시했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 들어와 소련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1930년대 소련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매년 수만 명 정도였는데, 1960년대가 되자 수십만 명이 방문했습니다. 소련당국은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을 제대로 통제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방문객들을 고립시킬 의지도 많이 약해졌습니다. 그 때문에 소련을 찾은 방문객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기자: 그들이 본 것은 무엇이었나요? 해마다 빠르게 성장하는 소련 공업을 보았을까요 아니면 소련제 미사일 제조 공장을 구경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미사일도 공업도 아닙니다. 방문객들이 본 것은 바로 소련 공민들의 일상생활입니다. 소련의 일상생활은 당시에 선진국 기준으로 매우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했고 먹는 음식도 좋지 않았습니다. 방문객 자신들이 국내에서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먹는 음식과 똑같았습니다. 방문객들이 소련 상점에 가 보면, 물건도 충분치 않고 줄도 길었습니다. 실제 소련은 그들이 꿈꾸던 공산주의 낙원이 아니라 그냥 못 사는 나라였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소개한 캠브리지 5인조, 즉 1930년대 영국 최고 엘리트 출신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캠브리지 5인조는 대학시절에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고, 소련이 세계역사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나라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영국 정보기관이나 외무성에 취직해서 국가비밀을 소련에 마구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조차 소련에 간 다음에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공산주의를 여전히 믿었습니다.

기자: 소련의 일상생활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인 자신들의 나라에서 매우 못사는 사람들이 먹는 음식과 소련 공민들이 먹는 음식이 비슷했다니 소박한 지식인들이 많이 놀랐을 듯합습니다.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이것은 약간 역설적인 일입니다. 서방 방문객들이 많이 왔던 1960-70년대 소련의 일반인들의 생활은 1930년대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좋아졌습니다. 물론 미국이나 영국이나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스탈린 시대보다 인민생활 수준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소련 인민들이 훨씬 어렵게 살던 1930년대, 서방 사람들은 소련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방의 젊은 지식인들은 갈 수도 없는 소련을 마음대로 상상했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알 수 없어서 머릿속에서 환상과 같은 소련을 만들고, 그것을 열심히 믿었습니다. 결국 1930년대 소련이 세계에서 인기가 많았던 이유중에 하나는 바로 스탈린 대원수가 열심히 했던 쇄국정치 덕분이었습니다.

기자: 러시아 툴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한덕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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