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주택 거래

워싱턴-한덕인 hand@rfa.org
202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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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모스크바에 세워진 아파트 모습.
1966년 모스크바에 세워진 아파트 모습.
/AP

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란코프 교수님, 최근 한국에서는 주택 가격이 빠르게 상승해서 사회문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정부 사람들 대부분은 부동산 문제를 엄중히 다루겠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오늘날 북한의 주요 도시에서도 부동산 시장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북한에서도 부동산 시장이라는 것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북한 간부들은 이 상황에 눈을 감고, 마치 부동산 시장이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기자: 그렇다면 옛날 공산주의소련에서도 부동산 시장이 없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북한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원래 소련에서 도시에 있는 주택 대부분은 국가소유였고, 이 점은 북한과 비슷하지만 몇 가지 차이가 있었습니다.

기자: 어떻게 달랐나요?

란코프 교수: 북한에서도 1950년대까지 개인소유였던 집은 오늘날까지 개인소유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소련에서는 시골에 있는 주택들 대부분이 개인 소유였습니다. 소련에서 개인 주택은 주로 단독 주택입니다. 가끔 2층주택도 있지만 조금 예외적인 것입니다. 도시에서 다층 주택은 대부분이 국가 소유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사람들은 국가에 임대료를 냈지만, 마음대로 입사할 수가 없고, 국가기관이 발급한 입사증을 받아야만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입사증을 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역별, 시대별로 큰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큰 도시에서 입사증 받기는 별따기입니다.

기자: 그런데 입사증을 받는 것이 별따기라 해도 어떤 비리나 불법적 수단을 통해서 어떻게든 큰 도시에서 입사증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없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런 경우도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별로 없었습니다. 소련시대 비리가 있기는 했지만 별로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가에서 입사증을 받기 어렵다면 또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즉 자기 돈으로 집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기자: 공산주의국가인 소련에서도 개인이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건가요?

란코프 교수: 당시에 소련에는 개인소유 주택, 국가소유 주택은 물론 협동소유 주택도 있었습니다. 다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개인주택은 압도적으로 시골에 있는 단독주택입니다. 시골에서 개인은 집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마음대로 지을 수는 없습니다. 건설하기 전에 당국자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시골 지역에서 허락을 받기는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국가주택은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협동주택은 원래 1937년까지 있다가 없어졌지만 1958년부터 다시 부활했습니다.

기자: 교수님 조금 전 언급하신 협동주택이란 무엇인가요?

란코프 교수: 협동주택은 돈이 있는 사람들이 국가기관에 돈을 바치고, 이 돈으로 다층 건물을 건설하는 방식입니다. 자신들의 돈이 부족하면, 국가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도 있었습니다. 보통 선불, 즉 먼저 내는 돈은 주택가격의 4분의 1 정도였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돈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돈을 내면 협동소유 주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란코프 교수: 그렇지 않습니다. 돈만 있다고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살림조건이 좋은 사람이라 협동주택 건설에 낼 돈이 있더라도 돈을 내지 못했습니다. 규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일반 입사증보다 협동주택 건설은 훨씬 더 쉬웠습니다.

기자: 왜 돈이 있는 사람은 협동주택을 얻을 수 없었나요?

란코프 교수: 돈이 있는 사람이 벌써 큰 집이 있다면 추가로 협동주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에게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작은 집에서 주민등록을 하는 방법도 있고, 여러 특권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화폐, 즉 루블 대신에 미국달러나 일본 엔과 같은 화폐로 협동주택 건설에 돈을 낸다면, 큰 집이 이미 있는 사람들도 협동주택 건설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공산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돈을 엄청 좋아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자: 협동주택의 가격은 어느 정도였을지 궁금합니다.

란코프 교수: 시대별, 지역별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1970년대 방 하나가 딸린 작은 집이면 4000-5000루블 정도였습니다. 선금으로 4분의 1을 먼저 내고, 나머지 잔금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받고 조금씩 낼 수도 있었습니다.

기자: 말씀하신 대로라면 선금, 즉 먼저 내야 하는 돈은 1970년대 기준으로 약 1300루블 정도인데요. 당시 기준으로 많은 돈이었나요?

란코프 교수: 이것은 당시에 일반사무원이나 하급 간부가 6개월에서 10개월 정도 번 돈에 해당합니다. 뿐만 아니라 협동주택에 입사한다면, 일반 국가소유 주택에서 내는 입사료보다 훨씬 큰 돈을 매달 내야 했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도시에서 소련 사람이 새로운 집을 얻는 방법은 협동소유 주택밖에 없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다른 방법도 있었습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주택교환입니다. 원래도 있었고, 1960년대 들어와 많이 활발해졌습니다. 북한에서도 비슷한 것이 있는데, 주민들이 사는 집을 서로 바꾸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한 부부가 이혼한 경우 그들이 살았던 비교적 큰 집을 작은 집 2개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반면 부모가 늙어서 같이 살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면, 작은 집 2개 대신에 큰 집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택 교환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교환할 때 주택판매를 위장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기자: 주택판매를 위장한다는 것이 집을 교환할 때 추가비용을 낸다는 건가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이것은 원래 비법이지만, 1970년대 들어와 누구나 하는 공공연한 행동이 되었습니다. 잡힐 위험이 거의 없었습니다. 돈이 조금 생긴 사람은 당연히 보다 더 좋은 집으로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조건이 엄격한 협동소유 주택으로 못 갑니다. 이 경우에 어떻게 할까요? 자기가 사는 집보다 조금 더 좋은 집을 찾고,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돈을 조금 줍니다. 물론 집주인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돈을 받고 보다 작은 집으로 가도 불만이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자본주의 형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공산주의정권은 이와 같은 습관을 없애버리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기자: 교수님, 그렇다면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한 가정이 여러 채의 집을 가지는 일도 있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말로만 문제였고 사실상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같은 가족이 교환으로 집을 두 채나 세 채를 얻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집이 세 채라면 남편, 부인, 성인 자녀는 각기 주민등록을 따로 하고 공식적으론 모두 다 다른 집에 산다는 주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집에서 살 수도 있고, 다른 집에 임대를 줄 수도 있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소련역사가 준 교훈 중의 하나는 시장문화를 없애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기자: 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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