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간부들의 극단적 선택
2020.07.21
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얼마 전 남한의 박원순 서울 시장이 갑자기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서울 시장이면 대통령 다음으로 힘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까? 남한에서 ‘소통령’이라고 불린다고도 하는데요. 과거 공산주의 시대에 최고위급 간부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전례가 있을까요?
란코프 교수: 네 있었습니다. 오늘은 소련공산당 고급 간부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사례들에 대해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소련공산당에서 제일 높은 10명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이 없지 않았습니다.
기자: 제일 높은 사람이라면 정치국 위원인가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정치국 위원도 있었고, 또 가맹공화국 책임비서 중에도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소련은 여러 가맹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국가였습니다. 가맹공화국 숫자는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바뀌었는데, 5-16개 정도가 있었습니다.
기자: 가맹공화국 책임비서는 어느만큼 높은 사람인가요? 정치국 위원과 비슷한가요?
란코프 교수: 대체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자: 교수님, 그들은 음모와 암투가 많은 공산당 고급 정치의 세계에서 이 만큼 출세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인데요. 왜 그러한 선택을 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시대에 따라 큰 차이가 있습니다. 1930-40년대 스탈린의 숙청 때 수많은 간부들은 곧 숙청당할 것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전쟁 때는 많은 고급간부들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소련군대가 패배했다는 좌절감 때문에 그러기도 했습니다. 1950년대에는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 때문에 심한 타격을 받은 사람들이, 1960-70년대에는 대규모 비리나 부정부패 때문에 조사를 받기 시작한 간부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기자: 시대순으로 살펴보죠. 스탈린 숙청 시대에 얼마나 많은 간부가 그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나요?
란코프 교수: 1930년대말 고급간부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30명 정도였습니다. 예를 들면 1936년에 정치국 위원과 아르메니아 가맹공화국 책임비서가 사망했고, 1937년에는 소련군대 총정치국장, 소련 타스통신사 사장, 그리고 아르메니아 가맹공화국 책임비서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1938년에는 고급 보위원들이 많이 그랬고, 심지어 크렘린궁의 안전 책임자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북한식으로 말하면 호위사령관 비슷한 자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무렵에 정치국위원 겸 중공업상이었던 사람도 그랬습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 대부분은 곧 체포될 것을 알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명예와 가족들의 생명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기자: 그런데 교수님, 그렇게 사망한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데 성공했을까요? 소련공산당은 그들에게 애도를 표시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흥미롭게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역사학자들은 정확한 이유를 찾지 못했지만, 가끔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들은 자연사했을 때와 비슷하게 당의 공식 추모 논평을 듣고, 호화스러운 장례식이 열리고, 그 가족들도 계속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적인 일인데요. 대부분의 경우에는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들은 책임을 기피하려 겁을 먹었다고 단정되고, 매국노와 배신자, 제국주의 간첩이라고 규정되었습니다. 그 가족들은 연좌제 원칙에 따라 감옥이나 유배지로 갔습니다. 대체로 말하면 김일성시대 북조선과 달리 소련에서 연좌제가 별로 없었는데요. 하지만 고급간부들이라면 그 가족들은 무조건 연좌제 원칙 대상이 되었습니다.
기자: 1940년대 전쟁시대에는 많은 군인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그들 중에 대부분은 파쇼독일군대에 포위되었을 때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1941년 전쟁이 시작되자 소련군대는 심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자기나라 군대의 심각한 패배를 본 고급 장교들 중 일부는 심한 타격을 받고, 자신의 무력함과 죽은 병사들에 대한 미안감 때문에 그랬습니다.
기자: 1953년 스탈린은 사망하고, 후계자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많이 격하했고, 스탈린시대 체포되었던 100만명의 정치범 거의 모두를 석방했습니다. 사실상 인권이 많이 개선되었는데요. 왜 이 시대에 스스로 극단적인 한 고급간부가 있을까요?
란코프 교수: 바로 이 시대에 스탈린을 흠모했던 여러 고급간부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미래에 대해서 공포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는데요.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격하했을 때도, 정치범들을 석방했을 때에도, 무죄한 사람들을 매일매일 감옥으로 보냈던 보위원들에게 아무 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시대 고급간부들 가운데서는, 미안감과 실망감, 양심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스탈린시대 문학 최고책임자인 파데예프인데요. 북조선에서도 꽤 알려진 사람입니다. 바로 청년근위대를 쓴 사람입니다. 그는 거의 20년동안 작가동맹 최고책임자로서, 작가들을 숙청할 때마다 숙청명령서에 사인한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무죄한 사람들, 그리고 스탈린 대원수를 열심히 찬양하던 사람까지 수용소나 사형장으로 보낸 책임자 중 한 명입니다. 파데예프는 원래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약간 의심이 있었는데요. 1956년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미안감을 견딜 수 없어서 스스로 사망했습니다. 거의 같은 무렵엔 당중앙이 출간하는 당 생활잡지의 편집장도 그렇게 사망했습니다. .
기자: 그렇다면 교수님, 고급 보위원 중에서 스탈린의 숙청이 올바른 일이었고,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위업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같은 선택을 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당시에 고급보위원 가운데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사람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탈린 격하에 불만을 가져서 죽는 것을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만행 때문에 미안감을 느껴서 그랬는지는 제대로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기자: 1950년대 이후, 소련 고급 정치는 많이 안전해졌습니다. 이제 숙청을 당해도 죽을 위험이 없습니다. 지방의 낮은 직위로 쫓겨나는 정도인데요. 1950년대 이후 고급간부들은 어땠나요?
란코프 교수: 새로운 시대에도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내무상도, 내무성 부상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가맹공화국 책임비서, 그리고 이 만큼 높은 사람들 중에 몇 명의 사망자가 있습니다. 1970-80년대에도 수십명의 고급 간부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이들이 사망한 기본 이유는 뇌물을 받고, 이런저런 불법행위를 했기 때문에 조사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자: 이들은 조사를 받는다고 해도 사형을 당하지 않는데 왜 이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사형을 당하지 않는다고 해도 감옥으로 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감옥으로 가지 않는다고 해도 해임, 출당당했을 것입니다. 이 시대에 이같은 결정을 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죽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기자: 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