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자유를 보장해 준 공산국가

워싱턴-노정민 nohj@rfa.org
201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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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토 대통령과 부인(왼쪽)이 사라예보에서 신년 축하 행사를 한 후 전철에서 출근길의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티토 대통령과 부인(왼쪽)이 사라예보에서 신년 축하 행사를 한 후 전철에서 출근길의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AP Photo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개인의 자유가 가장 많이 허용됐던 옛 유고슬라비아

- 옛 유고슬라비아… 북한과 비슷하지만, 차이점도 많아

- 최고지도자 찌또, 옛 소련 스탈린과 갈등 빚기도

- 1970년대, 북한과 관계 개선 나서기도


공산주의 국가에서 국민에 대한 단속과 통제는 필수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임에도 국민에게 최대한 자유를 보장해 준 나라가 있는데요, 어디였을까요? 오늘은 옛 유고슬라비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교수님, 지난 시간에 공산권 역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참혹한 나라는 1970년대 폴 포트 시대의 캄푸치아(캄보디아)라고 하셨습니다. 한편, 주민에 대한 통제가 제일 엄격한 나라는 김일성 시대의 북한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렇다면 자유를 가장 많이 허용한 공산권 국가는 어디였을까요?

[란코프 교수] 물론 기준이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다른 공산권, 즉 사회주의 진영 국가보다 개인의 자유가 가장 많았던 나라는 옛 유고슬라비아나 뽈스카(폴란드)였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자유가 제일 많은 유고슬라비아와 주민 감시가 제일 엄격했던 북한은 매우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찌토와 북한의 김일성은 매우 친했는데요. 그런데 유고슬라비아는 1950년, 북한이 소련 스탈린과 중국 모택동에게 허락을 받고 남한을 침략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나라입니다. 유고슬라비아의 대표자는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사실을 유엔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한을 지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측은 북한을 침략자로 비난하는 유엔 결의를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 교수님, 당시 모든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은 스탈린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스탈린은 1950년 1월, 김일성에게 남한을 공격해도 된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럼에도 북한은 남한을 침공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고슬라비아는 왜 이러한 태도를 보였을까요?

[란코프 교수] 1950년 당시 소련과 유고슬라비아는 관계가 매우 나빴습니다. 소련의 관영 언론은 찌또를 배신자, 파쇼독재자, 미제 간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흥미롭게도 1960-70년대, 유고슬라비아의 최고지도자인 찌또를 극찬했던 북한의 관영언론은, 1940년대 말에는 그를 미친 사람이나 미제 간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북한 평범한 사람은 옛날 신문 근처에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 유고슬라비아의 최고지도자는 찌또라는 사람인데요. 그는 어떤 사람인가요?

[란코프 교수] 우리가 얼마 전에 찌또 이야기를 조금 했었는데요. 그는 1920년대부터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간부로 지냈습니다. 또 1930년대 말에는 당시 국내에서 인기가 조금 있었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1941년에 유고슬라비아가 파쇼 독일의 침략을 당했을 때부터 찌또는 국내에서 유격대를 조직하고, 반파쇼 유격대의 사령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 찌또와 김일성은 조금 비슷해 보이는데요.

[란코프 교수] 그들은 비슷한 점이 없지 않은데, 차이점도 너무 많았습니다. 김일성은 자신의 부하들이 가장 많을 때도 수백 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찌또 원수의 유격대는 수만 명 규모였습니다. 거의 모든 것이 거짓말뿐인 북한과 달리, 실제로 김일성은 유격운동 지도자 수백 명 중의 한 명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찌또는 거의 처음부터 반파쇼 유격운동의 최고지도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래도 김일성, 찌또 모두 자신을 유격대 출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둘 다 공산주의 사상보다 민족주의 사상이 너무 강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찌또는 처음부터 다른 사회주의 국가를 통제하려 했던 스탈린에 대해서 의심이 많았습니다. 그 때문에 1948년에 그는 유고슬라비아 국가이익과 어긋나는 스탈린의 명령을 공개적으로 거부했습니다. 결국 스탈린은 찌또를 배신자, 미제 간첩이라며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탈린은 자신이 명령만 내리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찌또를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큰 착각이었습니다. 찌또처럼 유격대 출신인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간부들은 민족주의 정신이 너무 커서 스탈린의 압박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친소파 간부들도 숙청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노 기자님, 이 사건을 들었을 때 연상되는 사건이 있지 않습니까?

- 글쎄요. 1956년 8월 종파 사건과 비슷해 보이는데, 맞나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1940년대 말 찌또를 공격하고 다른 지도자로 대체할 생각까지 있었던 소련 지도자가 스탈린이고, 1956-57년 김일성을 공격했던 소련 지도자는 흐루쇼프입니다. 이 때문에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수십 년 동안 스탈린을 악마처럼 생각했고, 흐루쇼프는 높이 평가했습니다. 반대로 북한에서는 흐루쇼프를 미친 듯이 싫어했고, 스탈린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1948년에 있었던 유고슬라비아 사건이나, 1956-57년 8월의 종파 사건은 매우 비슷합니다.

- 그렇다면 나중에 어떻게 되었나요?

[란코프 교수] 찌또를 비롯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들은 스탈린과 싸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식 사회주의, 즉 유고슬라비아식 사회주의를 많이 주장했습니다. 이것도 북한과 매우 비슷한 모습입니다.
당연히 북한식 사회주의는 소련식 사회주의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악독합니다. 반면, 유고슬라비아식 사회주의는 옛 소련보다 자유가 더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1960년대부터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은 해외여행의 자유가 허용됐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독일을 비롯한 여러 잘 사는 유럽 국가에 많이 갔습니다. 문학이나 문화에서도 검열이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또 대외정책 면에서 유고는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소련과 관계를 정상화했습니다. 그러나 모스크바가 시키는 대로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 중국과 소련이 대립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중립이었습니다.

- 방금 하신 말씀을 들으니, 이것도 북한과 매우 비슷해 보이는데요. 그렇다면 북한과 유고슬라비아는 관계가 좋았습니까?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스탈린 시대에 북한은 소련이 시키는 대로 유고슬라비아나 찌또를 미친 듯이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와 관계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북한은 유고슬라비아와 같이 ‘쁠록불가담운동’에서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또 1977년에 찌또는 평양을 방문했고, 매우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1950년대 초 로동신문은 찌또를 파쇼독재자, 미제 간첩, 배신자라고 주장했는데, 1970년대에 로동신문은 같은 사람을 세계 진보세력과 조선의 위대한 친구로 소개했습니다. 국내정치를 보면 북한과 유고슬라비아처럼 모습이 너무 다른 공산국가를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둘 다 독립노선을 했고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 그들은 사실상 소련을 억제하는 동맹과 비슷한 관계였습니다. 이것은 정치입니다.

네, 오늘은 교수님과 함께 공산권 국가 중에 자유를 가장 많이 허용한 유고슬라비아와 최고 지도자인 찌또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란코프 교수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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