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루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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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최근 동유럽의 벨라루스에서는 매일 대규모 군중이 거리로 나와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벨라루스라면 대통령이 26년째 독재하고 있는 나라인데 왜 갑자기 대규모 데모가 시작되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지금 벨라루스에서 사실상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벨라루스 상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벨라루스는 원래 소련에 속한 15개 가맹공화국 중 하나였는데, 1991년 소련이 무너진 다음에 독립했습니다. 하지만 벨라루스 역사의 배경은 다른 소련 가맹공화국들과 조금 다릅니다. 기본적인 차이점은 벨라루스는 민족주의 경향이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기자: 왜 그럴까요?

란코프 교수: 역사와 민족 배경 때문입니다. 오늘날 벨라루스 지역은 폴란드에 속하거나, 아니면 제정 러시아에 속했습니다. 어느정도 우크라이나와 비슷하지만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벌써 18세기부터 우크라이나어를 하는 지식인 계층이 생겼고, 그들은 우크라이나말로 된 문학작품을 만들고, 러시아와 구별되는 정체성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에서 17-18세기에 자치권이 아주 많았습니다. 하지만 벨라루스는 사뭇 다릅니다. 그냥 러시아의 일부 또는 우크라이나, 폴란드의 일부였습니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노어(러시아어) 아니면 폴란드말을 배웠습니다. 제 조상들은 이 지역의 농노 출신들입니다. 조상들은 나중에 교육을 조금 받자, 러시아어와 폴란드어로 소통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초까지 이 지역에서 독자적인 지식인계층도, 정치 계층도 없었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그냥 러시아의 일부라도 해도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기자: 그런데 교수님, 벨라루스는 백러시아라고도 하는데요, 백러시아 민족은 러시아인과 다른 민족인가요?

란코프 교수: 이것은 매우 복잡한 질문입니다. 1917년 10월혁명 이후 벨라루스에서 그 전에 서민들만 쓰던 벨라루스말로 된 문학과 교육이 등장했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가맹공화국에 비해서 민족의식이 매우 약했습니다. 특히 벨라루스어와 노어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북한식으로 말하면 함경북도 옛날 사투리와 평양 옛날 사투리의 차이 수준입니다. 알아듣기가 조금 어렵지만 가능합니다. 당시에 종교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는데,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종교 차이도 없었습니다. 물론 20세기에 들어와 벨라루스에서 민족주의가 어느 정도 생겼지만,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대부분 구소련 가맹공화국과 달리 벨라루스 가맹공화국의 민족의식은 거의 없는 정도로 약했습니다.

기자: 설명을 들으니 벨라루스는 러시아와 거의 차이가 없는 것 같군요. 1917년 소련공산당은 왜 벨라루스를 러시아의 한 주로 만들지 않고 왜 일부러 별도의 가맹공화국으로 만들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당시에 러시아의 한 주로 만들 가능성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맹공화국으로 만든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당시에 폴란드에 살고 있던 벨라루스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1910-20년대 동부 폴란드에서 벨라루스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러시아인들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폴란드사람들과 분명히 차이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폴란드에서 벨라루스 사람들은 심한 차별을 당했습니다. 소련은 당시에 폴란드와 사이가 매우 나빴고, 그 때문에 소련은 벨라루스 가맹공화국을 만들고, 폴란드에서 차별을 당하는 벨라루스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 생각이 있었습니다. 1939년 폴란드가 독일에게 패배하자, 소련은 폴란드의 벨라루스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군대를 보내고, 이 지역을 합병했습니다. 결국 이 넓은 지역은 벨라루스 가맹공화국의 속하게 되었습니다.

기자: 교수님, 벨라루스 가맹공화국에 서는 반소, 반공산당 운동이 있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없지 않아도 그 세력은 매우 약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41년에 벨라루스가 파쇼독일 침략을 당했을 때, 벨라루스사람들은 아마 러시아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싸웠습니다. 결국 벨라루스인구의 4분의 1 정도가 전사했습니다. 이것은 너무 높은 숫자입니다. 러시아, 폴란드보다 훨씬 높은 숫자입니다. 죽은 사람 다수는 주로 유격대 활동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벨라루스에 살던 유대인들도 대부분 파쇼독일 군대에 의해 피살되었습니다. 당시에 러시아사람들 중에는 친독일 세력들이 등장했는데, 벨라루스에서는 친독일 세력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소련공산당 입장에서 제일 믿을만한 지역입니다.

기자: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후에 벨라루스는 소련공산당에게 많은 보상을 받았을까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투자를 많이 받아서, 그 전에 매우 어렵게 살던 농업지역인 벨라루스에서 공업지대가 많이 등장했습니다. 공업화는 매우 성공적인 것이었지만, 다른 소련지역처럼 갈수록 경제성장이 느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다른 소련지역과 달리 독립 할 생각이 거의 없었습니다.

기자: 교수님, 그렇다면 벨라 루스는 왜 1991년에 독립했습니까?

란코프 교수: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1980년대 말 소련에서는 처음부터 소련공산당정권을 싫어하고, 자신을 강점된 지역으로 생각하는 가맹공화국이 몇 개 있었습니다. 발틱 3국 지역입니다. 예를 들면 에스토니아 등 입니다. 이러한 경향이 없어도 독립을 원하는 가맹공화국들도 있었습니다.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입니다. 한편으로 독립생각이 거의 없는 지역도 있었는데, 바로 벨라루스와 같은 지역입니다. 하지만 1991년에 모스크바에서 반공산당 세력은 소련연방을 해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옐친입니다, 옐친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가 권력을 얻기 위해서 소련을 해체했다고 주장합니다. 옐친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러시아공화국 입장에서 구소련은 경제부담이기 때문에 소련 해체는 올바른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건 소련은 해체되었고, 많은 정치인들은 얼마 후 소련을 대체하는 어떤 연방국가가 다시 생길 줄 알았습니다. 당시에 그들이 희망한 새로운 연방국가의 핵심은 바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으로 구성되는 연방입니다.

기자: 그렇다면 1991년 당시에 벨라루스 사람들에게 독립은 임시적인 일로 여겨졌나요?

란코프 교수: 네 어느 정도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가 지금 알 수 있듯이 새로운 연방국가가 등장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92-93년에 러시아에서도, 벨라루스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소련 해체가 임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벨라루스에서는 완벽한 독립을 찬양하는 민족주의 목소리가 별로 크지 않았습니다.

기자: 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