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루스의 역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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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란코프 교수님, 저희는 지난 시간에 벨라루스의 역사를 살펴보았는데요. 1991년 소련이 무너졌을 때, 벨라루스 인민들은 소련에서 독립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별로 없었습니다. 서방 벨라루스 출신 사람들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원래 폴란드 통치를 받던 지역 출신입니다. 하지만 인구 대다수는 1991년 소련 해체와 자기 나라의 독립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도 1992년에 벨라루스는 자기 화폐도, 자기 군대도 만들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화폐를 만들었을 때 자기나라의 상징물을 쓰는 대신에 동물들의 모습을 도안으로 썼습니다. 산토끼도 다람쥐도 있었습니다.

기자: 당시에 벨라루스 사람들은 국가 상징물도 없는 것 같은데요. 그들은 독립국가를 건설할 의지가 진짜 있었습니까?

란코프 교수: 의지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1994년에 원래 소련시대 협동농장을 관리했던 알렉산드르 루카센코라는 사람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독립을 지지하는 대신에, 러시아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조만간 연방국가까지 만들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루카센코 대통령의 압박 때문에 헌법도 바꾸고, 벨라루스말뿐만 아니라 노어(러시아말) 국어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벨라루스인구 중 3분의 2는 이미 노어를 일상회화로 썼습니다. 그 때문에 루카센코의 정책은 처음에 지지를 받았습니다.

기자: 교수님,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을 반대하고, 이웃나라에 합병시키겠다고 하고, 이웃나라 말을 국어로 지정했습니다. 루카센코는 진짜 국가를 러시아와 병합시킬 생각이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아닙니다. 원래 사람들은 루카센코가 곧 벨라루스를 러시아에 합병시킬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교묘한 정책이었습니다. 루카센코는 자신의 친러시아 입장을 강조하고, 러시아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는데, 특히 기름과 자연가스를 배우 값싸게 수입할 수 있었습니다. 벨라루스 경제는 성장했습니다. 대부분의 구소련 나라들보다 벨라루스는 더 잘 살게 되었습니다. 루카센코가 집권한 이후 20년 동안 1인당 총생산은 6배 증가했습니다.

기자: 20년 동안 6배 더 잘 살게 되었는데요. 대단한 성과입니다. 루카센코는 어떤 경제정책을 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간단하게 말하면 등소평시대, 즉 1980-90년대 중국과 매우 비슷한 정책이었습니다. 국가의 통제가 남아있지만, 시장경제를 도입했습니다. 대기업은 수많은 경우 여전히 국가 통제가 남아있지만 자유가 많아졌습니다. 중기업이나 식당, 작은 가게는 개인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루카센코는 러시아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경제발전 조건이 보다 더 유리했습니다.

기자: 하지만 루카센코는 유럽 최후의 독재자라고 불리는데요. 그는 한번이라도 자유 선거를 한 적이 있나요?

란코프 교수: 루카센코가 당선된 1994년 선거는 민주선거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는 조작이 많았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1990년대말 루카센코를 반대하는 야당 지도자 몇 명은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특무기관 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되고 피살되었습니다. 이것은 수십년 전의 남미 국가들에서나 볼 수 있었던 국가테러 정책입니다. 그래도 벨라루스 국민들은 놀라울 정도로 개인 자유가 많았습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외국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정부 세력이 조직을 만드는 것은 엄격히 통제되었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벨라루스에서 시민 운동 단체를 만들면 감옥으로 가나요?

란코프 교수: 이것은 옛날식 독재입니다. 벨라루스에서 대부분의 경우에 반정부 운동가들은 정부의 부드러운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직장에서 해고될 수도 있고, 자녀들은 좋은 학교에 가지 못할 수도 있고, 거리에서 데모를 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기자: 그래도 얼마 전까지 벨라루스 국민 대부분은 루카센코 정권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는데요.

란코프 교수: 사실입니다. 경제성장은 중요했습니다. 남한에서도 1960-70년대 박정희정권은 독재정권이지만, 세계역사상 전례가 없는 경제 성장을 가져왔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습니다.

기자: 하지만 벨라루스는 지금 오랜 안정이 무너지고, 20만명의 시민들이 거리에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고 있는데요. 시민들은 왜 화가 났을까요?

란코프 교수: 몇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2010년대 들어와 루카센코는 친러정책을 포기했습니다. 루카센코는 우크라이나에 러시아가 개입한 것을 보고, 자신도 겁을 많이 먹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러시아와 서방국가의 대립을 이용하고, 어느정도 중립 외교도 시도했습니다. 문제는 그 때문에 러시아에서 지원을 옛날만큼 많이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2015년부터 러시아에서 받는 지원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한편으로 서방 민주국가 영향을 받은 벨라루스 청년학생과 도시사람들은 갈수록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기자: 이번 혁명은 왜 발생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얼마 전 벨라루스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루카센코는 사전에 비밀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지지율이 많이 낮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야당 후보의 등록을 방해하고, 일부는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결국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게 된 한 야당 후보자의 부인은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지만 상징 뿐이었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선거는 어땠을까요?

란코프 교수: 루카센코는 자신이 당선되었다고 주장했고, 80%의 지지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심한 날조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화가 났습니다. 벨라루스에서는 제대로 된 반정부단체가 없어서, 시위는 대체로 시민들에 의해 자발적 참여에 의해 주도되고 있습니다. 경찰은 여전히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어서, 반정부 운동을 매우 참혹하게 진압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로 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보름 정도 벨라루스 대도시 중심부는 시위대가 차지한 광장이 되었습니다.

기자: 루카센코 정권은 심한 위기에 빠져 있는데요. 외부 세력들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란코프 교수: 흥미롭게도 루카센코는 선거 직전까지 러시아가 자신을 반대하고, 부정선거까지 저질렀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선거 이후에 푸틴대통령과 러시아를 자신의 보호자라고 주장하고, 서방 민주국가를 많이 공격하고 있습니다. 현 단계에서 외부세력은 매우 중립적인 태도입니다. 유럽연합은 인권 침해와 경찰의 잔혹한 진압을 비난했지만, 그래도 소극적인 태도입니다. 러시아도 루카센코와 시위대 사이에서 대체로 중립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 단계에서 벨라루스 혁명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습니다.

기자: 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