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범까지 외화벌이에 이용헀던 동독
2018.09.25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마음만 먹으면 서독으로 갈 수 있던 동독 주민들
- 서독에 도착하면 환영금 받기도
- 동독 정부, 돈 받고 정치범 보내기도
- 전화∙편지 교환은 물론 서독 TV방송까지 시청한 동독 주민
'남북한 주민이 서로 언제든 왕래하고, 전화통화나 편지를 주고받는다.' 상상해 보셨나요? 현실적으로 쉽지않은 이야기인데요, 같은 분단국가였던 동독과 서독에서는 가능했다고 합니다. 동독 주민이 마음만 먹으면 서독에 갈 수 있었고, 전화∙편지 교환은 물론 서독 TV까지 시청했다고 하는데요. 남북한의 상황과 다른 점이 많았던 동서독의 교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교수님, 지난 시간에 간부가 아닌 일반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갈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한국이나 북한에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 많이 놀랄텐데요. 동독 주민은 진짜 서독으로 갈 수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분단된 한반도와 분단된 도이칠란트, 즉 독일은 다른 점이 참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동독에서 서독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집이 거의 없었습니다. 방문까지 가능했습니다.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이 생길 때까지 베를린 안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동베를린 주민은 자유롭게 서쪽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베를린 장벽이 생긴 이후 자유여행은 불가능했지만, 1964년부터 동독 주민은 서독에 갈 수 있었습니다. 제한이 아주 많았지만, 갈수록 완화됐습니다.
- 제한이 많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제한이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1964년부터 1972년까지 합법적으로 서독을 방문할 수 있던 사람들은 연금을 받는 노인들뿐이었습니다. 당연히 노인들은 서독을 방문하면서 서독 생활을 많이 배웠고, 동독에 돌아와 가족, 친구들에게 서독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이것도 동독의 국가기반을 많이 약화시키는 민간 교류였습니다.
하지만 1972년 이후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당시 동서독의 관계 정상화 덕분에 동독 주민은 마음만 먹으면 서독 방문을 신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매년 서독방문을 승인받은 받은 주민이 4~5만명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1986년 이후, 즉 동독이 붕괴하기 직전에는 숫자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1986년 이후 매년 서독으로 갔다 돌아온 동독 주민이 수십만 명 정도였습니다. 대체적으로 1960~80년대에 서독을 방문한 동독 사람은 매년 약 4~5만명 정도였습니다.
- 그들의 표현으로 '자본주의 반동들의 소굴'인 서독에 가면 어떤 대우를 받았나요?
[란코프 교수] 당시 동독 사람들은 사실상 거의 돈이 없는 상태로 서독에 갔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동독 사람이 서독 검문소에 도착하면, 그냥 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환영금이라고 합니다. 매년 두 번씩 30마르크씩 받을 수 있었는데요, 이 돈으로 간단한 음식을 9번 정도 사 먹을 수 있었습니다.
- 일반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갔다고 하셨는데요. 그들은 어떻게 자본주의 나라인 서독으로 갈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나요?
[란코프 교수] 동독 당국자들은 정치 문제가 없는 사람들에게만 서독 방문을 허락했습니다. 신청한 사람들가운데 원래 절반 이상이 거부당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당시 정치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서방으로 완전히 이민을 갈 수 있었습니다. 북한 사람은 이해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서독 정부는 동독 정부에 돈을 주고 동독의 정치범 수용소나 형무소에 있던 정치범들이 서독에 올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 교수님, 그렇다면 동독 정부는 돈을 받고 정치범들까지 서독으로 보냈다는 말씀인가요? 규모는 얼마나 됐나요?
[란코프 교수] 그들은 돈을 받고 정치범을 석방해 서독으로 보냈습니다. 공산주의국가인 동독은 돈을 받고, 민주주의국가인 서독에 정치범들을 팔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석방돼 서독으로 출국한 동독 사람은 1964년부터 1989년까지 3만 6천명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정치범 석방은 아주 비쌌습니다. 3만 6천명의 석방을 얻어내기 위해서 서독이 동독에 보낸 돈은 34억 마르크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2018년 달러 환율로 계산하면 45억달러 정도입니다. 한 사람당 12만5천 달러입니다. 이것은 동독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 진영의 역사를 보면 반공산주의, 반체제 운동을 했던 정치범들을 대거 해외로 팔아치운 나라는 없었습니다.
- 그래서 동독 사람은 누구나 신청할 수 있고, 별 문제가 없으면 서독으로 갈 수 있다고 하셨는습니다. 또 반체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도 가끔 서독에서 돈을 받으면 그들을 서독으로 보내기도 했고요. 그럼 흩어진 가족들은 어떻게 됐나요?
[란코프 교수] 제가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도이칠란트에서 편지 교류와 전화 통화까지 가능했습니다. 이 때문에 남북한처럼 흩어진 가족(이산가족) 문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흥미롭게도 1972년 이후 서독에 있는 가까운 가족이나 친족이 갑자기 죽거나 결혼했을 때에는 동독 사람이 단기 방문 허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서독에서 살던 이모가 죽었다면 동독의 조카가 당과 국가기관을 찾아 2~3일 이내에 모든 서류를 준비하고 서독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유일한 조건은 노인이 아닐 경우, 동독에 배우자와 자녀들이 남아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당연히 인질 역할입니다. 그래도 이와 같은 자유는 남북한에서 상상조차 불가능한 것입니다.
- 편지교류도 가능하고 전화통화까지 가능하다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방송 시청이나 청취는 가능했나요?
[란코프 교수] 매우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동독은 면적이 그리 크지 않았고, 거의 어디에서나 서독의 라디오방송뿐 아니라 텔레비전 신호를 받는 것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특히 동독의 가장 중심부에는 사실상 서독의 영토와 다를 바가 없는 서베를린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 들어와 동독 주민의 90% 정도는 서독의 텔레비전 방송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서독 방송을 볼 수 없던 지역이 조금 있었는데, 그 지역은 무지한 사람들의 골짜기로 불렸습니다. 예를 들면 드레스덴 일대입니다. 심지어 어떤 서독 방송은 서독보다 동독에서 더 인기가 많았습니다.
- 교수님, 그럼 동독 당국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서독 방송을 보지 못하게 방해전파를 쐈나요?
[란코프 교수]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방해전파를 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서베를린이 있다는 문제도 있었고, 국토 대부분이 서독 방송시설의 권역 안에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동독 당국자들은 더 재미있게 국영방송을 만들려 했습니다. 그래서 동독 텔레비전 방송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제대로 경쟁할 수 없었습니다. 동독 텔레비전 방송은 사상성과 당성이 높아야 했기 때문에, 서독방송만큼 재미있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서독의 영향이 참 컸습니다. 예를 들어 서방 채널에는 광고가 많지 않습니까? 동독에서도 이를 흉내내고 비슷한 상품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독 텔레비전의 영향 때문에 동독에서 고급 가루비누 생산이 시작된 것이 한 예입니다.
네, 오늘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동서독 주민의 왕래를 비롯한 민간교류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란코프 교수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