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 총비서의 등장과 정책 (1)
2018.10.02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등장과 정책 (1)>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구소련의 문제점: 경제 위기, 체제에 대한 실망, 민족주의 갈등
- 갈수록 심해지는 경제적 격차에 불만 커져
- “우리가 이대로 살 수 없다”, 급격한 개혁의 필요성 인식
- 고르바초프 총 비서의 ‘페레스트로이카’, 세 가지 계획 제시
구 소련의 본격적인 개혁개방을 이끈 사람으로 고르바초프 전 총비서를 떠올리게 됩니다. 대부분 소련 국민은 체제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컸는데요. 이때 고르바초프 총비서가 등장하면서 변화를 선포했고 국민의 지지를 받았지만, 한편으로 큰 변화를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고르바초프 전 총비서의 등장과 정책에 대해 살펴봅니다.
- 교수님, 북한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고르바초프라고 하는데요. 사회주의를 배신한 사람이라고 한다죠? 대부분 사람은 페레스트로이카가 소련의 붕괴를 초래했다고 하는데요, 고르바초프의 정책이 없었다면 소련이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소련에서 태어나서 자라신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란코프 교수] 물론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소련의 붕괴를 어느 정도 가속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지도자가 되지 않았다 해도, 소련이 생존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말씀드리면, 저나 제 친구들이 1980년쯤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소련체제는 늦어도 2000년대 초에는 무너질 것으로 많이 생각했습니다. 당시 소련의 상황을 아는 사람이라면, 소비에트연방은 극복하기 어려운 모순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제가 볼 때, 기본적인 문제가 세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만성적인 경제 위기였고, 둘째는 갈수록 빠르게 심각해지는 체제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었습니다. 인민들은 체제를 지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민족주의입니다. 소련을 구성하는 민족들 사이에 갈등이 갈수록 심각해졌습니다.
- 교수님, 제일 중요한 문제는 역시 경제인가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그렇습니다. 1985년 기준으로 소련공업의 생산성은 미국의 3분의 1 수준이었습니다. 농업은 7분의 1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소련 농민 7명은, 미국 농민 1명만큼 농산물을 생산했습니다. 소비 생활에서 차이가 아주 많이 났습니다. 비교해보면 소련 도당 지도원의 생활은 미국 또는 독일의 숙련노동자 생활과 비슷했습니다.
이 문제를 초래한 것은 명령식 국가사회주의 경제, 즉 중앙계획 경제였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나 중앙계획경제는 도입 직후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고속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시장경제만큼 빨리 성장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소련 역사뿐 아니라, 다른 공산국가에서 공통으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이 때문에 소련은 잘 사는 다른 자본주의 선진국보다 경제 수준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1960년대 말부터 이 격차는 갈수록 커졌습니다. 소련은 서방 유럽이나 미국, 일본 등을 당연히 따라잡을 수 없었고, 그들보다 훨씬 못 살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인민들은 소련 체제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 그런데 교수님, 소련 체제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불러온 것은 아닌가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물론 체제에 대한 실망을 가져온 것은 무엇보다 갈수록 악화하는 소련과 선진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경제적 격차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보면, 경제적 격차보다 주민들 스스로 격차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바꾸어 말하면 1960-70년대 이후 소련 인민들은 누구든지 소련이 미국보다 매우 낙후한 나라인 것을 잘 알았습니다. 소련 사람들이 가끔 수입영화를 볼 때 자본주의 나라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북한과 달리 소련에서는 영국이나 미국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됐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사람들은 해외 출장도 갈 수 있었고, 해외에서 외국 사람의 모습을 직접 볼 수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소련사람 대부분은 경제와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의식이 커졌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대로 살 수 없다’라는 말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가장 잘 반영한 표현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1980년대 초중반, 거의 모든 소련사람은 급격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흥미롭게도 당시에 변화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교수님, 1980년대 들어와 대부분 소련국민은 민주화와 시장경제의 도입을 희망했다는 말씀이신가요?
[란코프 교수]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에 소련 사람은 급격한 변화를 원했지만, 그들 대부분에게 급격한 변화가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1980년대 초 대도시의 지식인들, 특히 청년 학생들 가운데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극소수였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희망하는 것은 사회주의를 개량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인기가 있던 말 중의 하나는 ‘우리 사회주의는 몸이 아프고,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당시 대부분 사람은 사회주의를 고치는 방법이 부분적인 민주화와 자유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일당제 정치를 없애야 한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지만, 공산당 내부와 언론에서 비판과 토론의 자유가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제는 시장경제가 아니더라도 소규모 개인기업을 허락하고, 유연성이 없는 국가사회주의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소련 사람은 급격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해야 할 지 잘 몰랐습니다. 이 입장에서 고르바초프가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교수님, 고르바초프는 총비서가 된 다음에 페레스트로이카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무엇인가요?
[란코프 교수] 1985년 4월에 고르바초프는 공산당 총비서가 된 이후 나라를 바꿀 의지가 있다는 것을 공표했습니다. 이같은 태도는 당시 소련 국민에게 매우 뜨거운 환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처음에 구체적인 계획을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그의 계획은 3가지입니다. 하나는 글라스노스트입니다. 이것은 언론 자유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잘못과 비리, 실수를 언론이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다는 정책입니다.
둘째는 우스카리니아입니다. 우스카리니아라는 말은 가속화를 의미하는 로어(러시아어)입니다. 기본 목적은 갈수록 느려졌던 경제성장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경제성장을 가속화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아무런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는 바로 페레스트로이카입니다. 이 말은 러시아말로 재건이나 재구조화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소련 정치와 사회를 바꾸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대부분 소련사람처럼 당시의 옛날 체제를 꼭 바꿔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지만,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몰랐습니다.
네, 오늘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등장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란코프 교수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