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치개혁
2018.10.16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정치를 고치면 경제문제가 해결될 것이란 믿음
- 첫 개혁조치로 언론에 대한 검열 완화
- 공산주의와 체제, 인물 비판하는 기사와 문학 작품 등장
-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소련 국민의 열망 대변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경제개혁과 함께 정치개혁에도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특히 언론에 대한 검열을 완화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와 논문, 문학작품까지 등장했는데요. 이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소련 국민의 큰 기대가 배경이 됐습니다. 그렇다면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어떤 정치개혁을 펼쳤을까요?
- 교수님. 지난 시간에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경제개혁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당시 소련의 분위기를 알려면 정치개혁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어떤 정치개혁을 했나요?
[란코프 교수] 먼저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개인 배경을 살펴봐야 합니다. 북한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간부집 아들이 아니면 고급간부가 될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소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소련이 무너졌을 때까지 대부분 고급간부는 노동자, 농민 출신이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농민집 아들입니다. 그는 1960년대에 모스크바 국립대학을 다녔습니다. 당시 소련에서는 북한의 김일성대학 만큼 명문 대학이라고 할 수 있지만, 1960년대 개량된 사회주의의 꿈의 온상이었습니다. 당시에 고르바초프와 함께 대학을 다니던 사람 중에 누가 있는지 아십니까? 1968년 소련의 무력간섭으로 타도된 체코 공산당에서 개혁을 시도한 창시자 중 몇 명이 있었습니다. 그 중 오토슈기라는 사람은 고르바초프의 좋은 친구였습니다. 그와 같이 학교에 다니던 학생과 교수들도 사회주의 개량을 위해 정치와 문화가 더 중요한 줄 알았습니다. 또 그들은 정치를 고치면 경제문제가 하루아침에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1960년대에 고르바초프와 그 친구들이 믿었던 것은, 그들이 고급간부가 된 1980년대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교수님. 그들은 어떤 것을 믿었나요?
[란코프 교수] 기본적으로 고르바초프와 그 친구들은 서방국가처럼 자유민주주의를 시행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일당제가 좋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공산당 내부에서 1920년대 말부터 완전히 사라진 언론자유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또 그들은 당원과 간부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고 토론한다면, 문제가 쉽게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르바초프와 그 친구들은 19세기 말, 초기 공산주의자들처럼 비판과 자기비판의 힘을 믿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비판은 북한의 생활총화에서 하는 비판과 완전히 다릅니다. 정말 건설적인 비판입니다. 또 그들은 언론자유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언론이 간부들의 잘못을 자유롭게 비판하고, 여러 정책의 장점과 약점을 소개한다면 공산당 지도부가 더 올바른 정책을 펼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이러한 자유가 국가사회주의 체제나 공산당 권력을 위협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들은 소련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공산당과 사회주의를 지지할 줄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일반 국민이 하급간부를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어도, 공산당과 기본 원칙을 비판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큰 환상이었습니다.
- 그렇다면 고르바초프 총비서가 제일 먼저 한 정치개혁은 무엇인가요?
[란코프 교수] 고르바초프는 취임 즉시 언론에 대한 검열을 완화했습니다. 1987년에 들어와 이전에 소련 신문에서 볼 수 없었던 기사들이 가끔씩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간부들의 부정부패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특히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 역사 이야기는 1980년대 말 정말 인기가 높았습니다.
- 왜 그랬을까요?
[란코프 교수] 당시 공산당은 소련체제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많이 왜곡된 역사관을 학교와 언론, 신문을 통해 보급했습니다. 소련 역사에 대한 왜곡과 거짓말도 많았고, 전혀 언급하지 말아야 할 것도 많았습니다.
1937년에 있었던 스탈린의 대숙청이 대표적인데, 대숙청 당시 1917년에 10월 혁명을 지도했던 사람 대부분이 외국 간첩이란 혐의로 고문을 받고, 처형됐습니다. 이와 관련해 1950년대부터 고르바초프 총비서가 취임할 때까지 소련지도부의 공식적인 태도는 사실상 침묵뿐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1930년대에 스탈린과 그 측근들이 죽여버린 공산당 지도자들이 공식적으로 복권되었고, 무고한 희생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숙청을 큰 실수라고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언론이나 문학작품 등에서는 1937년의 숙청에 대해서 언급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 교수님. 그들은 1937년의 대숙청을 기억하기 싫다는 입장이었나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1986년부터 숙청 당시 피살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많아졌습니다. 당시 언론의 주장은 1917년 레닌혁명은 올바른 것이지만, 나중에 스탈린에 의해서 많이 왜곡되었다는 겁니다. 레닌 시대의 공산당 고급 간부들이 거의 다 1930년대 말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처형된 이유는, 그들이 양심적이고 깨끗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언론에서 이런 기사가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탈린 숙청을 묘사하는 문학작품이 갑자기 많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 작품 대부분은 1960년대에 쓰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숙청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작가들은 자신의 소설을 발표하지 못했습니다. 1986~87년에 비로소 가능하게 됐습니다. 당시의 작가들은 아직 레닌이나 공산주의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공격대상은 스탈린뿐이었습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의 배신자로 묘사됐습니다.
- 나중에 어떻게 되었나요?
[란코프 교수] 소련 역사를 보면 흥미로운 특징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개혁을 시작하면 주민들이 고맙게 생각할 줄 알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민들은 정권의 양보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양보 때문에 주민들의 불만이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1987~88년 이후에는 이전에 사회주의를 포기할 생각조차 없었던 소련 국민 사이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갈수록 개량된 사회주의보다는 완벽한 자유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 당시 언론과 문학은 어땠나요?
[란코프 교수] 1987~88년부터 언론의 내용이 많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비판이 가능한 주제와 인물이 많아졌습니다. 소련 국민 사이에서 체제에 대한 불만이 커진 가운데 그들이 싫어하는 문제를 초래한 것은 스탈린 시대의 왜곡과 실수가 아니라, 공산주의 원칙과 체제 자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또 신문과 잡지들의 자유가 갈수록 많아졌습니다. 레닌에 대한 비판도 생겼고,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나 논문, 그리고 소설과 기타 문학작품까지 발표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1990년대에는 고르바초프 총비서를 공격하는 글까지 가끔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소련사람 대부분은 이러한 정책을 환영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커서 그렇습니다.
- 네. 오늘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치개혁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