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쿠데타와 막내린 고르바초프 시대
2018.11.06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1991년 8월에 군사 쿠데타 발생
- 체제 고수 위해 쿠데타 일으켰지만, 국민의 민주화 열망만 확인
- 도시 시민 중심으로 쿠데타 반대 시위 확산…군인들도 동참
-새 시대와변화 열망한 국민 앞에서 사흘 만에 끝난 쿠데타
- 쿠데타 이후 옐친의 등장으로 막 내린 고르바초프 시대…소련 해체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치개혁과 함께 공산주의 사상과 체제에 대한 비판이 가능해졌고, 경제 악화로 국민의 불만이 확산하면서 소련에서는 새로운 시대와 변화에 대한 갈망이 커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1991년, 체제를 유지하려는 세력의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는데요. 하지만 무력이 새 시대에 대한 열망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 교수님, 지난 시간에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인기가 낮아지고 경제는 더욱 악화해 소련이 곧 무너질 상황에 처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위태로운 소련체제에 마지막 치명타를 준 것이 바로 1991년 8월 19일에 발생한 쿠데타 정변이었습니다. 이 쿠데타는 왜 발생했나요?
[란코프 교수]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1989~90년부터 고르바초프 총비서에 대한 인민들의 지지가 많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기본적인 이유는 역시 국가 경제가 더 빠른 속도로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미 대부분 소련 국민은 옛날 체제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1988~89년까지 거의 들리지 않았던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비판도 빠르게 확산했습니다.
당시에 대부분 소련 국민이 믿었던 것은 소련이 가능한 한 빨리 공산주의 사상을 포기하면, 몇 년 만에 미국이나 독일처럼 잘 살 수 있다는 겁니다. 당연히 이것은 진실과 거리가 먼 환상이었습니다. 하지만 1991년의 소련은 반공 민주화 혁명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혁명이 온다면 매우 어려운 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하고, 며칠 사이에 세상이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 교수님께서는 혁명이 환상과 착각, 그리고 별 근거가 없는 희망일뿐이라고 하셨는데요. 좀 냉정하게 들리거든요. 소련 국민이 이렇게 생각했다면, 소련체제를 보호하려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을까요?
[란코프 교수] 있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많지 않았습니다. 1991년 8월에 있었던 쿠데타는 당시 소련체제를 지지하는 반혁명, 친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지지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 사건입니다.
당시 대다수 소련사람은 가능한 한 빨리 체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8월 쿠데타 정변을 일으킨 사람들은 소수의 최고위급 간부들이었습니다. 소련 부통령이었던 야나예프, 내무상인 푸고, 국방상의 야조프, 그리고 KGB 책임자 등이었습니다. 이 나이 많은 간부들의 희망은 고르바초프를 고립시키고, 민주화 운동의 최고지도자 몇 명을 체포한다면 반체제 세력을 쉽게 진압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이들도 환상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은 자기 나라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조금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 교수님. 그럼 쿠데타 정변을 일으킨 세력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나요?
[란코프 교수] 당시에 고르바초프 총비서가 크림반도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8월 19일 오전 4시, 그곳에 주둔한 KGB 부대가 별장을 포위했습니다. 오전 6시, 중앙방송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고르바초프 총비서가 몸이 아파서 일할 수 없다고 발표했습니다. 동시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근처에 주둔한 군대는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 이것이야말로 정말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데요. 당시에 소련 국민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란코프 교수] 전체 소련 국민의 의견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시골 사람들은 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언제나 역사의 물결을 바꾸는 핵심 세력은 도시 시민들입니다. 바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인데요. 민주주의와 변화를 매우 희망했던 사람들은 거리로 나갔습니다. 8월 19일 오후 모스크바에서 약 20~30만 명이 거리로 나갔습니다. 대규모 시위였습니다. 이것은 쿠데타 정변을 일으킨 세력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도시로 진입한 군대가 소련과 공산주의를 지키는 것보다 민주화와 시장화를 지키겠다는 선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19일 오후에는 일부 탱크부대의 군관들이 옐친을 지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 교수님, 보리스 옐친은 그때 반공 민주화 세력의 상징이었나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사실 쿠데타 세력은 그를 체포할 생각도 했지만, 군대와 KGB 부대까지 반대했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쿠데타 세력의 입장에서 이는 큰 실수였습니다. 옐친은 모스크바의 백악관으로 알려진 러시아연방 내각 건물에 도착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이곳은 반 쿠데타 세력의 본부가 됐습니다. 레닌그라드에서 민주화 세력의 지도자가 된 사람은 소브차크 교수였습니다. 지금 러시아 대통령인 푸틴의 정치적 아버지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 교수님. 한 가지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은 푸틴 대통령이 원래 KGB의 간부였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공산주의 체제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었나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체제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보위원이던, 소련군대 군관이던, 당 간부이던 옛날처럼 살기 싫었습니다. 그들이 희망했던 미래는 비록 민주화 운동을 하는 청년 학생이나 지식인들이 희망했던 미래와 크게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들도 국가사회주의나 공산당 독재체제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당시의 푸틴은 이미 민주화의 지도자인 소브차크 교수의 부하였습니다. 야나예프, 야조프와 같은 옛날 사람들은 군대 병사나 KGB 보위원들의 마음을 잘 몰랐습니다. 8월 20일 아침이 되자 대부분 군대는 중립이거나 옐친을 지지하는 태도가 분명해졌습니다.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8월 20일 늦은 저녁 야조프와 야나예프를 비롯한 쿠데타 세력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모스크바 민중들을 학살하거나 탱크로 이들을 진압해 정권을 지킬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있었다고 해도 실행에 옮길 힘이 없었습니다.
- 그렇다면 쿠데타는 8월 20일에 끝났나요? 어떻게 마무리됐나요?
[란코프 교수] 8월 21일 오전 3시, 공군 사령관인 샤보시니크 대장이 야조프 국방상을 찾아가 사실상 항복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공군 사령관의 요청은 국방상이 비상사태위원회를 해체하고 모스크바에 있는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시간 사이에 해군 사령관과 대륙간미사일 사령관도 이 요청을 강력히 지지했습니다. 야조프는 중급 군관뿐 아니라 장성들조차 지지하지 않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8월 21일 오후, 야조프는 항복했습니다.
- 이렇게 쿠데타가 실패로 끝났는데요. 당시 쿠데타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나요?
[란코프 교수] 다행히 피의 보복은 없었습니다. 시위 참가자 중 3명이 죽었습니다. 그 후에 푸고 내무상을 비롯한 당 중앙 고급간부 3~4명 정도가 자살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조사를 받으면서 잠깐 감옥에 있다가 석방됐습니다. 대부분 옛날에 세운 공훈 때문에 많은 연금과 혜택을 받으며 잘 살았습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이 사건 이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반면, 나라의 권력을 장악한 옐친은, 1991년 12월에 우크라아나, 백러시아, 카자흐스탄의 최고지도자들과 함께 소련의 해체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고르바초프 대통령도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 네. 오늘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소련에서 발생한 쿠데타와 고르바초프 시대의 끝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