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사건(2) - 반공산당 운동의 시작

워싱턴-노정민 nohj@rfa.org
2018.12.04
hao_yaobang_b 1989년 4월 19일 중국의 대학생들이 천안문광장에서 하오야오방(호요방)의 대형 초상화를 들고 민주화 시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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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만주화∙개혁개방 지지한 호요방의 사망이 불씨

- 호요방의 추모 행사 때 천안문 광장에 수만 명 운집

- 시간 흐를수록 더 많은 사람 모여, 중국 지도부에 요구사항 제출

- 북경 시내에서 사실상 반공산당 운동 시작


중국에서 발생한 민주화 시위를 중국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한 천안문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국민의 경제생활은 나아졌지만, 특권층의 부정부패와 빈부 격차에 불만을 가진 국민을 중심으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민주화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천안문 사건의 발생 원인부터 내용, 의미를 살펴볼 텐데요, 오늘 두 번째 시간입니다.

- 저희가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천안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볼 텐데요. 지난 시간에는 천안문 사건의 시작과 배경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교수님께서 1980년대에 중국 사회에서 누적돼 온 불만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셨는데요. 누적돼온 불만이 1986년 학생 시위로 노출됐죠. 물론 중국 정부가 이 시위를 진압했지만, 중국사회의 불만은 계속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1989년 4월에 북경에서 큰 위기가 시작됐는데, 근본적으로 이 위기를 초래한 것은 무엇인가요?

[란코프 교수]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1986년에 민주화보다 더 결연한 개혁개방을 요구하는 대규모 대학생 시위가 중국 내 여러 도시에서 발발했습니다. 이 시위를 간접적으로 지지한 중국의 고급 간부들이 있었는데, 당시 중국의 총서기였던 호요방이 그 대표자입니다. 그는 자유화와 민주화를 무조건 진압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등소평과 갈등이 생겨 퇴직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변화를 갈망하는 많은 국민에게 호요방은 여전히 희망의 대상이었습니다.
1989년 4월에 호요방이 급사하자 북경에서 추모 행사가 시작됐는데, 이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이 적극적으로 참가했습니다. 4월 15일부터 북경 중심에 있는 천안문광장에서 수만 명의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의 핵심은 중국에서 가장 좋은 학교인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의 학생들이었습니다.
특히 천안문에서 자발적으로 호요방에 대한 추모 행사를 시작한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천안문 광장은 중국 역사에서 의미가 매우 깊은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 교수님. 개인적으로 천안문 광장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중국 역사에서 의미가 깊은 장소인지는 잘 모르거든요. 왜 의미가 깊은 장소인가요?

[란코프 교수] 천안문 광장은 명나라 시대, 즉 500~600년 전부터 중국의 수도인 북경에서 가장 크고 제일 중요한 광장입니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중국 황제들이 살았던 궁전의 정문 앞에 위치하고 있고, 지금도 중국 공산당 총서기를 비롯한 고급 간부들이 사는 지역과 매우 가깝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안문광장 옆에는 매우 중요한 국가기관이 있습니다. 모택동의 묘지도 천안문광장에 있습니다. 또 북한의 최고인민회의에 해당하는 중국 전국 인민대표자회의도 같은 광장에 위치합니다.
역사적으로도 20세기에 천안문 광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혁명운동이 여러 번 일어났습니다. 1919년에 있었던 5.4운동, 즉 중국 문화와 사회를 근대화∙민주화시키는 운동이 생겼을 때 많은 학생이 바로 천안문광장에 모였습니다. 1976년 주은래의 추모행사 당시에는 모택동과 그의 측근들, 즉 4인방에 반대하는 시위도 이곳에서 열렸습니다. 문화대혁명 당시에도 천안문광장은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1989년에 공산당 정권에 도전하려는 사람들은 천안문광장에 대해 처음부터 관심이 많았습니다.

- 원래 이 행사는 추모 행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후에는 어떻게 됐나요?

[란코프 교수] 애초 4월 15일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지만, 4월17일 저녁부터 청년과 학생들이 밤에도 광장을 떠나지 않고 이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그들은 천막과 확성기까지 설치했습니다. 4월17일에는 북경대학에 재학 중인 3천 명의 학생들이 천안문광장에 모여서 기본적인 요구를 담은 서류를 작성했습니다. 이 서류의 내용을 보면 심한 모순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그들은 당연히 호요방을 찬양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요구는 공산당과 정부가 고급 간부와 간부의 가족들에 대한 소득 통계를 공개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고급 간부들의 비리에 대한 분노 때문입니다. 동시에 언론에 대한 검열도 폐지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또 지식인들의 월급을 향상해 달라는 요구도 있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당시에 학생들과 대학교수의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있었지만, 기타 사회계층에 비해 빠르게 개선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러한 요구를 한 겁니다.

- 사실상 4월 15일에 호요방이 사망한 이후 북경 시내에서 대규모 반공산당 운동이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반응은 어땠나요?

[란코프 교수] 사실상 4월 15일에 호요방이 사망한 이후 북경 시내에서 대규모 반공산당 운동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심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4월 20일에 북경 경찰이 학생들을 탄압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습니다. 갈수록 천안문광장에 모이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특히 주말에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 4월 21일, 호요방의 장례식 때, 천안문광장에는 10만 명의 청년과 학생, 젊은 노동자들이 모였고, 장례식을 직접 보았습니다.
기타 중국의 도시에서도 같은 요구를 하는 시위가 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에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당시 총서기가 된 조자양은 학생 운동가들과 회담을 하고, 어느 정도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고급 간부들은 학생운동을 진압하지 않으면 공산당 일당 독재가 무너질 수 있고, 중국이라는 나라가 심한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교수님. 그렇다면 중국공산당 정치국 내부에서 두 세력이 갈등을 유발했다고 볼 수가 있겠는데요. 이들의 대립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란코프 교수] 흥미롭게도 조자양 총서기는 북한 평양에 갈 예정이었고, 예정대로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그를 대리한 이붕은 강경노선을 추진했고, 북한의 노동신문과 같은 중국 인민일보는 학생운동을 반혁명 운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인민일보에서 나온 4.26 사설입니다. 하지만 이 사설은 역효과를 초래했습니다. 다음날 천안문 광장에 모인 사람은 10만 명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설에 대해 분노를 표시했고, 자신들을 애국 운동가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붕을 비롯한 강경파는 이 결과를 보고 겁을 많이 먹었습니다.
그리고 4월 30일에 조자양 총서기는 평양에서 북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돌아오자 관영 언론에 지시를 내리고, 이제부터 천안문 시위를 많이 비판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강경파는 전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국내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경제위기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 시위를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당시에 강경파는 무력진압을 생각했던 건가요?

[란코프 교수] 조금 복잡합니다. 그들은 처음에 힘을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군대가 아니라 경찰을 생각했습니다. 강경파도 피가 많이 흐르면 안 된다는 태도였습니다. 1980년대 말 중국은 벌써 사람들을 쉽게 죽이는 정부나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결국 1989년 5월 말에 강경파가 우세하게 됐습니다.

- 본격적으로 천안문사건의 발발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는데요. 오늘은 북경에서 시작한 반공산당 운동에 대해서 교수님과 함께 살펴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도 천안문 사건에 대해서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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