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사건(5) - 폭동이라 주장한 중국 지도부

워싱턴-노정민 nohj@rfa.org
2018-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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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학생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민주화시위를 벌이고 있다.
1989년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학생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민주화시위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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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천안문 사건은 권력 유지하려는 중국 공산당의 의지 반영

- 중국 지도부의 경제 성장 정책은 개발 독재

- 중국 지도부 내 강경파의 승리, 막대한 부 축적 기반 마련

- 지금도 중국에서 천안문 사건은 침묵...누구도 말 못 해


중국에서 발생한 민주화 시위를 중국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한 천안문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국민의 경제생활은 나아졌지만, 특권층의 부정부패와 빈부 격차에 불만을 가진 국민을 중심으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민주화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몇 차례에 걸쳐 천안문 사건의 발생 원인부터 내용, 의미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오늘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 교수님. 저희가 계속 천안문 사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결국, 1989년 6월 4일에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민주화를 요구했던 북경 여러 대학의 학생들과 시위대를 탱크와 장갑차로 매우 참혹하게 진압했습니다. 이 사건은 중국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란코프 교수] 1989년 6월 4일에 발생한 사건은 중국 공산당이 끝까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싸울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당시 기타 사회주의 진영의 나라에서는 중국처럼 공산당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집권 계층은 반체제 대중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지 못했고, 그들의 압박에 굴복했습니다. 또 1980년대 말은 사회주의 진영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독재정권이 흔들리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도 천안문 사건이 발생하기 2년 전에 규모와 성격이 비슷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에 전두환을 비롯한 한국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쓰지 못했고, 사실상 민주화 운동에 항복했습니다. 그들은 중국 공산당과 달리, 서울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을 탱크로 진압할 생각이 아예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중국 지도부의 강경 노선은 중국 전체에,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에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앞으로 오랫동안 중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 토론도, 많은 후보가 경쟁하는 선거도 아닌, 당 중앙의 비밀스러운 회의와 음모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당시에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자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다른 방법도 있었습니다.

- 무슨 방법이 있었나요? 당시 이붕 총리나 실권자인 등소평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중국 인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이 문제에 대해 객관적으로 말하면 약간 모순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등소평과 같은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경제 성장을 절대적인 목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희망하는 것은 개발 독재입니다. 개발 독재를 간단히 말하면 시장 경제가 거의 자유롭게 성장함과 동시에 정치에 대해서는 엄격히 통제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등소평과 그 측근들은 시위자들이 중국 내에서 심각한 혼란과 무정부 상태, 그리고 대규모 폭력 등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특히 중국 지도자들은 피가 많이 흐르는 1920~30년대의 군벌 시대, 그리고 1960년대의 문화대혁명 시대를 아주 잘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학생들을 폭동세력, 혼란을 초래한 세력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선전 선동을 위해서만 하는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정말 진지하게 믿었습니다.

- 교수님. 그럼 공산당은 천안문 사건의 진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선전했나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공산당은 천안문 사건을 폭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980년대에 중국 국민은 아직 60~70년대 문화대혁명 시대의 폭력과 혼란을 잘 기억하고 있어서 폭동에 대한 공포가 컸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위자들은 중국을 약화하려는 외국 세력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중미 관계가 아직 좋았기 때문에 미국을 많이 비난하지 않고 그냥 외부세력을 공격했습니다.
이 같은 선전을 1년 정도 했는데, 이후 중국의 관영 언론은 천안문 사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이었습니다. 지금도 중국에서 이 사건은 절대 말하면 안 됩니다. 당시 시위에 대해서 열심히 비난하는 것도 안 됩니다. 유일한 방법은 침묵입니다. 그냥 잊어버리자는 겁니다. 해외에서 매년 6월 4일, 천안문 사건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보도가 많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아무런 보도나 행사도 없습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잘 기억하고 있는데, 그들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합니다. 결국 중국 국민 대부분은 이 사건이 있었던 것도 거의 알지 못합니다.

- 교수님. 당시에 공산당 내부에 노선대립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결국, 강경파가 승리했습니다. 강경파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강경파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고급 간부들은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당연히 그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없고 감옥으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과 가족들의 권력, 특권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처럼 강경파 그들은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 교수님. 그럼 강경파 사람들은 어떻게 성공했나요?

[란코프 교수] 나중에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간단히 설명하면 모두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등소평과 이붕 총리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열심히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족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의 가족뿐 아니라 먼 친척들까지 모두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고급 보위원이 꿈도 꿀 수 없는 큰돈입니다. 이 때문에 중국 공산당이 천안문 광장을 진압했을 때,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막대한 부정부패로 큰돈을 벌기 위한 기반을 잘 지켰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 그런데 교수님. 공산당이 추진한 경제 정책이 개발 독재라고 하셨는데요. 지난 시간에 등소평의 남중국 방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떤 관계가 있나요?

[란코프 교수] 제가 보니까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거의 40년 동안 중국 지도부가 시행해 온 정책의 기본 성격을 제일 잘 나타내는 정치적 사건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천안문 사건의 진압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등소평의 남중국 방문, 이른바 남순강화입니다. 천안문 사건은 중국 공산당이 정치 부문에서 자신의 독재에 대해 어떠한 도전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줬습니다. 또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많은 피를 흘릴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줬습니다. 한편으로 남순강화는 중국이 경제개혁에 더욱 속도를 내고, 사실상 자본주의 경제를 가능한 한 도입할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뿐 아니라 모든 개발독재의 기본 전략입니다. 1960년대 장개석 시대의 대만이든 1970년대 박정희 시대의 한국이든, 오늘날 중국이든 베트남이든 모든 개발독재는 이와 같은 전략을 시행했습니다.

- 네, 오늘은 교수님과 함께 중국 지도부가 당시 천안문 사건을 어떻게 선전하고 이용했는지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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