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 총비서 등장과 정책 (2)
2018.10.08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고르바초프 총비서 등장과 정책 (2)>
- 1970~80년대 소련 국민, 변화에 대한 의식 공감
- 극과 극을 오갔던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책
- 경제위기 극복 위해 술 소비도 엄격하게 제한
- 고르바초프 총비서가 취한 시장화와 정치개혁은?
‘변해야 한다’는 국민의 열망을 등에 업고 소련의 지도자로 등장한 고르바초프 총비서. 하지만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시장화와 정치개혁을 시행하긴 했지만, 정책 시행의 극과 극을 달렸는데요.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등장과 정책에 대해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 교수님, 지난 시간 우리는 1970-80년대 소련의 내부상황을 살펴봤습니다. 당시 거의 모든 소련 국민은 일반 사람이든 간부이든 모두 다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고 하셨고요.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등장이 바로 이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책은 어땠나요?
[란코프 교수]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1980년대 들어와 소련 사람들은 모두 나라의 모습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인식이 당시 소련의 정치와 사회 분위기를 결정했습니다. 그대로 사회주의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사회주의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사회주의를 개량하는 것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로 대립하는 몇 개의 제안들이 있었고, 한편으로 국민 대부분은 웽그리아(헝가리)와 같은 동유럽 국가들처럼 독립채산제, 기업관리제를 많이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일부 간부들은 국가의 감시능력과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나라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잘 몰랐고, 1985년 4월에 취임한 이후 1987년까지 서로 엇갈린 두 개의 정치 노선을 거의 동시에 시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교수님. 한 나라의 지도자가 나라를 어떻게 바꿔야 할 지 몰랐다는 것이 좀 이상해 보입니다. 마치 선장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배를 출발시킨 것 같은데요. 이것은 아주 불안한 현상이 아닐까요?
[란코프 교수] 이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르바초프 총비서뿐 아니라 대부분 소련 국민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독립채산제와 기업관리 책임제는 국가통제의 강화와 함께 이뤄질 수 없다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이 때문에 고르바초프의 정책은 극과 극을 오갔습니다. 나라를 어떻게 바꿔야 할 지 사실 아무도 몰랐습니다.
- 그렇다면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펼쳤나요?
[란코프 교수] 1986년에 모든 기업소에서 국가품질검사소가 생겼습니다. 러시아말로 ‘고스프리욘카’입니다. 이전에 군수 산업에만 있었던 제도인데, 바꾸어 말하면 기업소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이 기업소에서 만든 완성품이나 제품을 검사하고, 품질 수준이 표준에 맞지 않았을 때는 공장으로 물건을 돌려보냈습니다. 이것은 매우 대표적인 구식 방법입니다. 즉,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경제를 만들기 보다, 또 하나의 국가감시를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1985년,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술 소비를 줄이기 위해 매우 엄격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술 가격이 많이 올라가서 술을 판매할 수 있는 상점이 많이 없어졌고, 술을 합법적으로 살 수 있는 시간제한도 생겼습니다. 매일 몇 시간뿐이었습니다. 당시 술을 많이 마시던 소련 사람이 많은 불만을 표출한 정책이었습니다. 그런데 1986년, 소위 말하는 개인 노동법이 동시에 채택됐습니다. 개인 노동법은 사실상 중소기업에서 개인회사를 허용했습니다.
- 교수님.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왜 술 판매를 이만큼 엄격하게 제한했나요?
[란코프 교수] 당시 러시아 사람은 술을 참 많이 마셨습니다. 오늘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마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나친 술 소비가 경제의 어려움을 초래한 것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술 소비를 줄인다면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소박한 생각이었지만, 당시에 지지자가 많았습니다. 당시 술에 많이 취해있던 일반 국민은 불만이 컸습니다.
- 또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취임하자마자 시장화와 정치개혁을 시작했다고도 알려져 있는데요. 어떤 일을 했나요?
[란코프 교수] 조금 전 개인 노동법을 말씀드렸습니다. 개인 노동법은 당시 많은 사람, 특히 많은 지식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경제구조를 잘 보여줍니다. 1970년대부터 서유럽 생활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지식인과 일부 간부들은 소련에서 대기업이나 중소기업 대부분이 여전히 국가기업소로 남아 있어도, 식당이나 구두수리소 등 소규모 기업들은 개인소유가 되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국가가 봉사사업을 잘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들은 소규모 개인회사를 허용한다면, 불편한 점이 많았던 소련 생활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 그렇다면 교수님. 1986년부터 소련에서 개인회사가 허용된 건가요?
[란코프 교수] 물론 아닙니다. 이러한 개인회사는 노동자를 고용할 권리조차 없었습니다. 주인과 그 가족들만 일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게 됐지만, 그들은 종업원들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당국자들은 이러한 회사들을 협동회사라고 주장했습니다. 노동자들도 주인이라는 주장입니다. 물론 당연히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1986-87년 이후 이전에도 소련에 존재했지만, 매우 약했던 ‘돈주’라는 사회계층이 다시 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개인 노동법 말고, 다른 시장화 조치는 어떤 것이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1987년 소련은 기업소책임 관리제를 도입했습니다. 특히 대기업은 직접 다른 기업소와 주문계약을 만들 권리도 받았고, 무역회사를 독립적으로 창업할 권리도 얻었습니다. 책임관리제 기업소들은 노동자들을 필요에 맞게 고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많은 월급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잘 알 수가 없었지만, 이것은 명령식 사회주의 경제의 종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업소들은 빠른 속도로 국가의 통제와 감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농업에서 개인 농사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동유럽 국가나 중국과 달리, 고르바초프 총비서 시대의 소련은 포전담당제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당시 소련 경제에서 농업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런데 교수님. 왜 당시 인민들은 기업소책임 관리제의 도입이 명령경제의 종말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란코프 교수]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1989년까지 대부분 소련사람은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것보다 사회주의의 개량을 자신의 기본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소련 사람 사고방식의 특징 중의 하나는 경제관리 문제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은 당시 소련 국민의 집단적인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시에 주류를 이뤘던 생각은 ‘정치를 제대로 고치면 경제가 거의 자동으로 고쳐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치개혁을 제대로 봐야 당시 소련 사회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그렇군요. 시간 관계상 오늘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지금까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책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