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의 정치개혁 - 선거제도
2018.10.23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고르바초프의 정치개혁 - 선거제도>
-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신념, 정치 자유화
- 선거제도 개혁 선언, 한 선거구에 복수 후보 출마 가능
- 후보 간 경쟁, 공산당 체제에 대한 비판도 등장
- 젊은 간부들 사이에서 사회주의 체제 포기 확산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정치개혁이 모든 변화의 시작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대대적인 정치개혁을 시행했는데요, 언론 자유화와 문화적 개방은 물론 선거제도의 개혁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치개혁에 대해 더 살펴보겠습니다.
- 교수님, 지난 시간에 고르바초프 총비서가 정치개혁을 시작하면서 첫 단계로 문화, 언론개혁을 시행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에 추진한 정치개혁은 어떤 것이었나요?
[란코프 교수]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대부분 인민처럼 경제개혁을 간과했고, 문화와 정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특히 정치에서 올바른 개혁만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르바초프와 그의 지지자들은 처음부터 정치 자유화를 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1920년대 말, 즉 스탈린의 등장 때부터 소련은 북한만큼 끔찍하진 않지만, 독재국가였습니다. 고르바초프는 1987년 1월에 선거제 개혁을 선언했습니다. 새로운 선거 제도는 공산당이 아니라 소비에트, 북한식으로 말하면 인민위원회 선거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 교수님, 소련 시대의 선거는 북한의 선거와 비슷했나요?
[란코프 교수] 차이는 좀 있지만, 기본 구조가 비슷했습니다. 우선 1940년대 말 북한이라는 나라는 소련을 흉내 내 만들어졌습니다. 또 1948년 북한 헌법은 모스크바의 소련 지도부가 직접 수정, 비준한 것입니다. 선거제도의 기본 원칙은 선거구마다 후보가 한 명뿐입니다. 당연히 그 후보는 위에서 임명된 사람입니다. 북한에서 후보에 대한 찬성률이 100%라고 주장하는데, 소련에서는 보통 99%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말입니다.
- 그렇다면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선거제도를 어떻게 바꿨나요?
[란코프 교수] 1987년에 옛날 제도가 많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어떤 선거구에서는 몇 명의 후보가 동시에 출마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거의 70년 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선거 경쟁이 시작됐습니다. 당연히 공산당 외에 다른 정당이 없었고, 대부분 후보가 공산당을 비판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후보들끼리 경쟁했습니다. 그리고 1988년, 북한 최고인민회의에 해당하는 최고 소비에트에서 체제를 열심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소련의 경제 문제, 주민들에 대한 단속과 감시를 열심히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정말 소수파였지만, 인기가 높았습니다.
당시에 제가 직접 본 것은, 최고 소비에트 회의가 생중계될 때 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수신기로 회의를 듣고 있었습니다. 소수파 가운데 반공 민주화 세력의 지도자가 된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모스크바시당의 책임 비서였던 옐친이라는 사람입니다. 소련공산당에서 서열 3~4위의 높은 사람이고, 1980년에 공산당을 열심히 비판했습니다. 그는 정말 변화를 믿었을 수도 있고, 공산당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해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반공 민주화 운동의 또 다른 지도자는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의 소브차크 교수입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지금의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을 찾아내 성장시켰고, 그를 지원한 사람입니다. 푸틴은 1990년대에 소브차크가 큰 위기에 빠졌을 때 그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 교수님, 그러면 푸틴 대통령도 반공 민주화 세력 출신인가요?
[란코프 교수] 어느 정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푸틴은 중급 보위원이었는데, 당시에 보위원, 지식인, 교수, 노동자 등 모든 계층이 나라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변화를 크게 반대했던 사람들은 나이든 중급, 고급 간부들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소수였습니다.
물론 저는 당시 소련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 시대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때 제가 배운 것 중 하나는, 혁명이나 위기에도 대부분 사람은 정치에 관심이 없고, 명확한 정치적 입장이 없었습니다. 일반 국민은 정치와 사상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당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총인구의 10~20%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 중에서 1988~89년에는 소련체제를 잘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소련이 가능한 한 빨리 사회주의 체제를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몇 년 이내에 독일, 일본, 미국만큼 잘 사는 나라가 될 줄 알았습니다.
제가 자랑스럽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당시 저는 아직 젊은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소박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과도기가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당시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 최고 소비에트에서 공산당에 대한 공격이 많았다고 하셨는데요. 공산당의 반격은 어땠을까요?
[란코프 교수]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1987년 이후 공산당 내부의 종파 금지를 해제했습니다. 결국, 1988년에 있었던 당 대표자 회의에서 여러 정치 노선을 놓고 노골적인 대립과 논쟁이 시작됐습니다. 최고 소비에트처럼 공산당에서도 간부 대부분은 변화를 크게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원래 냉소적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젊은 공산당 간부들은 갈수록 변화를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사회주의를 지킬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젊은 간부들은 왜 사회주의 지키기를 포기했나요?
[란코프 교수] 당시 소련 사회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은 이미 1960~70년대에 죽어버렸습니다. 젊은 간부들에게 애국심은 있었지만, 공산주의 사상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권력 때문에 간부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1988-89년에 본 것은 무엇일까요? 국가사회주의 경제가 무너지면, 자신들이 얻을 게 많다는 겁니다. 젊은 간부들은 국가 소유였던 기업소나 회사 등을 개인소유로 만들 수 있고, 하루아침에 돈 많은 자본가나 사업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산당 KGB, 즉 보위성 등 국가기관의 젊은 간부들도 애국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시대착오적인 국가사회주의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1988~89년, 공산당 안에서도 체제를 지킬 마음이 있는 사람은 소수의 중고급간부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다 늙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을 지지하는 젊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1989~90년에 고르바초프가 주장한 개량된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가 많이 사라지고, 정치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은 하루빨리 완벽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매우 놀라운 것은 소련 사회주의가 무너졌을 때 그 체제를 지키려 했던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 보위원, 경찰, 군대 군관, 노동자, 농민, 지식인 등 모든 계층이 시대착오적인 체제가 하루빨리 사라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훗날 이들 중 소련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지만, 1990~91년에 많은 사람이 하루빨리 국가사회주의가 무너지기를 원했습니다.
- 네. 오늘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지난 시간에 이어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치개혁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